▲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여자라면 누구나 흔히 생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성형수술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태클’을 받았던 그는 기자와 인터뷰를 한 이후인 지난 25일 선수 자격정지 2년에서 국가대표 자격정지 6개월로 징계가 대폭 완화됐다. 대한펜싱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고 여론의 압력에 밀려 이같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육상에서 펜싱으로
남현희와 인터뷰를 섭외하면서 성형수술 파문과 관련된 얘기는 가급적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아니 그런 전제 조건이 깔려야 인터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걸었다.
남현희의 첫 인상은 펜싱 선수치고 키가 굉장히 작다는 사실이다(153cm). 얼핏 보면 칼이 키보다 더 길고 커 보일 만큼 왜소한 체격이 인상적이다.
펜싱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워낙 어린시절부터 운동 신경이 남달라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육상부에서 남현희를 ‘낚아챘다’. 그러나 육상부에서 일주일 정도를 보내자 뜀박질만 하는 육상이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학교에 펜싱부가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멀리뛰기를 하면 1등을 도맡을 만큼 순발력이 뛰어난 부분이 펜싱부 코치의 눈에 띄었고, 결국 달리기 대신 칼을 잡고 하얀색 펜싱복을 입는 걸로 방향 전환을 이뤘다.
“펜싱은 시간이 지나도 지겹지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하루하루가 새로움의 연속이었죠. 내 몸에 맞는다고나 할까. 그런 걸 느낀 이후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가 찾아서 배우고 훈련했어요. 국제대회 나가면 설령 일찍 탈락했다고 해도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어요. 유럽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가면서 그걸 가지고 분석하고 그대로 흉내도 내보고 했으니까요.”
남현희는 자신을 ‘펜싱에 미친 여자’로 표현했다. 펜싱이 안겨주는 매력에 푹 빠져서 10년 넘게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다.
‘땅콩’의 한계와 극복
2005년 들어 펜싱 규칙이 대폭 수정됐다. 특히 플뢰레 규칙이 ‘심하게’ 바뀌었다. 즉 찍는 기술만 통하던 것이 찌르기로 뒤바뀌며 팔, 다리에 통하는 규칙들이 전체적인 변화를 이뤘다. 10년 동안 몸에 익은 기술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고 토로한다.
그러다보니까 2004년까지만 해도 세계 랭킹 12위까지 올랐던 성적이 규칙이 바뀐 뒤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고질병인 척추측만증까지 겹쳐 고달픈 나날을 보냈던 남현희는 이런 표현으로 당시를 회상한다.
“내 펜싱 인생은 단 한 번도 편하게 진행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작은 키로 장신의 선수들을 상대하려면 난 두세 배 더 뛰어야 했거든요. 체력적인 소모가 심했죠. 칼이나 마스크도 그래요. 나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는 거예요. 키 큰 선수들이 쓰는 칼과 마스크를 쓰다보니까 그 부담이 척추쪽으로 간 것 같아요. 그래서 척추가 많이 아팠어요. 내 몸에 맞는 칼과 옷과 마스크를 쓰는 게 소원이었는데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더라구요. 결국 지난해 외국 시합 나가서 드디어 나한테 맞는 장비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 후론 아무리 뛰어다녀도 힘들지가 않았어요.”
▲ ‘성형 파문’을 일으켰던 남현희 선수는 징계완화 결정이 내려진 후 기자에게 ‘더욱 좋은 성과로 보답하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 ||
“난 시합 전에 시상대를 항상 마음에 담아둬요. 키 작은 내가 시상대에서 다른 선수들에게 묻히지 않으려면 1등이 올라서는 것 외엔 돋보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야 다른 선수들과 키가 대충 맞으니까.”
성형수술의 진실
남현희를 만나기 전 가장 궁금한 게 있었다. 쌍꺼풀 수술은 눈썹이 눈을 찔러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볼 지방 이식 수술은 순전히 성형을 목적으로 한 탓이기에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묻고 싶었다.
“외국 시합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날 한국 선수가 아닌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온 선수로 취급하더라구요. 왜소한 체격에다가 얼굴까지 별루이다 보니 장신의 유럽 선수들을 상대할 때마다 항상 열등감을 느꼈어요. 그러던 차에 국제 시합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을 틈 타 쌍꺼풀 수술을 받기로 한 거죠.”
성형외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남현희는 담당 의사한테 이렇게 물어봤다고 한다. “쌍꺼풀 말고 내 얼굴의 어느 부분을 고쳐야 조금 ‘있어 보이는’ 얼굴이 되느냐”는 내용이었다. 그 의사는 볼에 지방 이식을 하면 훨씬 부드러워 보일 것 같다고 조언을 했고 수술하고 회복하는데 3일 정도의 시간만 필요하다는 얘길 듣고 남현희는 지방이식수술까지 결정하게 된다.
“대표팀이 쉬는 금요일에 수술 받으면 다음 주 월요일부터 훈련에 참가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선 전화로 윤남진 감독님과 이성우 코치님한테도 허락을 받았구요. 그런데 회복이 예상외로 늦어지면서 월요일 훈련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죠.”
남현희는 대표팀 훈련 기간에 코칭스태프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성형수술을 받았고 그로 인해 훈련에 지장을 줬다는 이유로 펜싱협회로부터 자격 정지 2년이란 무거운 ‘형벌’을 받았었다. 자격 정지 2년은 금지약물을 복용하는 선수한테나 주어지는 가장 큰 징계다. 과정이야 어떻든 단순히 성형수술로 인해 2년이란 중징계가 내려진 부분에 대해선 여론이 협회의 가혹함과 그 뒷배경을 두고 연일 성토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등 협회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뜻밖의 파문 그후
“처음에 협회에서 코칭스태프 허락 유무를 확인했을 때 솔직히 그분들(감독, 코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서 허락받지 않고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어요. 가벼운 징계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결과는 정말 상상조차 못했던 2년 자격정지였어요. 그 후론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특히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수술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 말한 감독님 얘기를 듣곤 충격이 컸어요. 나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싶었죠.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남현희는 이번 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속 시원히 밝힐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만 언급했다. 속사정을 다 털어 놓았다가는 자신의 입지가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마음에 담아두겠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모든 걸 수술 전으로 되돌리고 싶어요. 좀 전에 수술한 거 후회 안 하냐고 물어보셨죠? 후회해요. 너무 많이 후회해요. 협회에서 징계를 완화해 준다고 해도 큰 상처로 남을 것 같네요. 믿고 따랐던 스승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깨졌으니까. 그게 더 많이 아파요.”
지난 25일 남현희는 대한펜싱협회 사무실에서 열린 상벌위원회에 참석했다. 남현희의 성형 수술 허락 여부와 관련해 진술이 엇갈린 윤남진 감독과 이성우 코치 등이 참석해 잘잘못을 따진 뒤 징계 수위를 최종 결정하는 자리였다. 결국 대한펜싱협회는 남현희에게 선수 자격정지 2년에서 국가대표 자격정지 6개월로 징계를 대폭 완화했다.
26일 남현희에게 격려 차원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보낸 답장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번 일로 많은 걸 느꼈어요. 더욱 좋은 모습과 좋은 성과로 보답할 게요. 문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