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 동안 박세리에 대해 쏟아진 기사의 주된 제목들이다. 골프 인생 최악의 슬럼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 시즌을 ‘수렁’에 빠져 허우적댄 그는 급기야 시즌을 포기하는 뼈아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손가락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치료차 귀국한 뒤 골프채 한 번 잡아보지 않고 펑펑 놀기만 했던 색다른 경험이 골프에 대한 새로운 도전 의식과 목표를 분명히 해주는 치유제로 작용했다.
지난해 겪은 박세리의 슬럼프에 대해 아버지 박준철씨는 ‘슬럼프의 미학’이라고 정정했다.
오늘 아침 미국에서 세리를 도와주고 있는 막내 애리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아빠, 세리 언니 정말 대단해요. 무슨 독 품고 운동하는 것 같아. 지켜만 봐도 힘들어 보이는데 나한테 내색조차 안하고 잘 때는 밤새 끙끙 앓아요. 아빠 걱정마세요. 올해는 진짜 잘 될 것 같아요.”
2005년 한 해 동안 난 신문을 거의 보지 않았다. 마치 세리의 부진을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신문마다 그 원인을 놓고 갖가지 추측 기사를 쏟아냈다. 한때 ‘국민 골퍼’ ‘골프 여왕’으로 묘사된 세리는 이런저런 슬럼프 원인과 진단 기사를 통해 ‘사연 많은 골퍼’ ‘골프 중독의 최후’ ‘결혼 못한 골퍼의 안타까움’ 등으로 묘사돼 내 감정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열받고 분노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뭔가 끓어오르는 듯할 정도다.
세리가 미국에서 메이저대회 4승을 포함, 통산 22승을 올리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예약해 놓았을 때 솔직히 난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슬럼프가 두려웠다. 그동안 크고 작은 슬럼프는 있었지만 짧은 시간에 해결이 됐기 때문에 어쩌면 진정한 슬럼프는 겪지 못했던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슬럼프가 지난해에 찾아 든 거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두 대회는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슬럼프의 정도가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5월 들어 컷오프 탈락이 계속됐다. 한 대회에선 77위란 꼴찌 성적표를 받아들기도 했다.
잠시 아찔해졌다. 무엇보다 세리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2005년 5월 중순 미켈롭울트라오픈대회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리는 ‘온통 골프뿐인 생활에 지쳤다’고 토로했다. 세리는 기자를 상대로 얘기했지만 내 귀엔 ‘아빠에 대한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급기야 7월에 열린 에비앙마스터즈에선 세리의 성적 부진을 이유로 출전을 거부당하기까지 했다.
마치 깊은 수렁의 밑바닥에까지 내려온 듯했다. 세리도 당황했지만 정작 난 공황 상태였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걸 밝혀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세리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슬럼프의 원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매스컴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스윙도, 조급증도 문제가 아니었다. 세리는 그저 쉬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 하와이 이민 시절, 아빠를 따라 골프장에 갔다가 시작된 골프와의 인연이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다가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난 그때 처음으로 내 딸한테 큰 죄를 짓는 듯했다. 성적 내고 우승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세리의 휴식이나 여가 생활은 내 계획 속에 없었다. 어렵게 시작한 골프였고 온갖 수모와 멸시를 참아가며 딸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느라 뒤돌아 볼 틈조차 없었기에 욕심도 컸고 세리 또한 아빠의 욕심을 이어갔다. 계속 ‘고’만 외치면 가는 줄 알았다. 은퇴 시기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완전한 내 착각이었다. 아빠의 뜻에 따라 무작정 따라왔던 세리로선 어느 순간부터 힘에 벅차다는 걸 절감했고 혼자서 부대끼면서도 내색 않고 참아보려 무척 애를 쓰다가 폭발한 것이다.
끝내 세리는 미LPGA 사무국에 ‘병가’를 제출하고 시즌을 접었다. 부상으로 더 이상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메디컬 익스텐션’을 내고 소속사 CJ가 주최하는 제주 CJ나인브릿지클래식도 접었다.
지난해 10월 손가락 부상을 당해 귀국했을 때 세리는 골프채를 갖고 들어오지 않았다. 골프채가 옆에 없으면 밥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골프를 시작한지 처음으로 자신의 ‘분신’을 놓고 와선 신나게 놀기만 하다가 돌아갔다.
격동의 2005년을 보내고 이제 재기를 확인하는 2006 시즌을 맞아 한 가지 감사할 게 있다. 세리의 슬럼프가 서른 살 이전에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만약 서른 살 넘어서 심한 슬럼프가 생겼다면 수습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한때 애니카 소렌스탐보다 더 잘 나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캐리 웹이나 ‘명예의 전당’ 입성에 2승을 남기고 있는 로라 데이비스의 장기간 슬럼프를 보면서 결과적으로 일찍 찾아온 세리의 슬럼프를 내심 반길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