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이란과의 평가전에서 프리킥을 하는 박주영. | ||
지난 2002한일월드컵 본선에서 우리 팀이 정지볼 상태에서 얻은 골은 미국전 안정환의 헤딩골과 3·4위전에서 이을용이 넣은 직접 프리킥 단 두 개뿐이다. 아드보카트호는 작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11경기 중 전 득점의 3분의 1을 정지볼을 통해 얻어냈다. 이걸 가지고 좋다 나쁘다 말할 상황은 아니지만 그만큼 체계적인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선수들 간의 미리 약속된 플레이가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논리적으로 그려볼 줄 안다는 학습효과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표다.
요즘 국제경기에서 통상적으로 각 팀은 한 게임당 4번의 킥오프, 9개의 골킥, 20개의 스로우 인, 15개의 프리킥, 10개의 코너킥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물론 통계상 그렇다는 소리다. 하여튼 이 통계대로라면 한 팀은 상대방 수비진영 쪽에서 약 20개의 정지볼 상황과 직면하게 된다. 즉 정지볼 상태에서 골이 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부터 극도의 압박축구가 낳은 부산물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자연스러운 필드골이 터지지 않도록 워낙 수비를 강화하다 보니 결국 프리킥 같은 조건하에서의 득점률을 높이기 위한 갖가지 기술이 동원되어왔다는 뜻이다.
90년 이탈리아월드컵대회에선 총 1백15골 중 정지볼에 의한 득점은 무려 32%(그 중 12%가 프리킥)였으며, 더운 날씨 탓에 압박축구의 구사가 불가능했던 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총 1백41골 중 25%의 정지볼 득점(그 중 8%만 프리킥)이 기록되어 있다. 2년 뒤 유로96에서는 그보다 약간 높은 27%. 그러나 이 대회에서는 놀랍게도 코너킥에 의한 득점이 17%나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팀이든 정지볼 상황에서의 득점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한 번 보자. 가장 기교가 뛰어나다는 브라질도 별 수 없다. 94, 98월드컵대회 때 브라질이 올린 첫 골은 모두 베베토의 코너킥에서 나왔다. 2002년 월드컵 터키와의 첫 경기. 선제골을 먹은 브라질은 겨우 히바우두의 페널티킥을 통해 가까스로 승점을 따낼 수 있었다. 다음 경기에서 브라질은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직접 프리킥 한 방을 시작으로 중국을 쉽게 농락했다. 이밖에도 월드컵이나 유럽컵의 주요 대결에서 프리킥이나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가른 예는 수도 없이 많다. 펠레가 올린 1천 번째 골, 78년 화란의 렌센브링크가 넣은 월드컵 1천 번째 골 모두 싱겁게 페널티킥이었다. 심지어 1990년 월드컵은 그 악명 높은 압박축구의 전통답게 겨우 1개의 페널티킥으로 우승국가가 가려졌을 정도다.
좀 논란이 있겠지만 프리킥에 의한 득점은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지능 싸움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요즘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직·간접 프리킥이 유행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반드시 아주 최근의 경향만은 결코 아니다. 과거 70년대 브라질은 펠레와 리벨리노의 직접 프리킥으로 무수히 많은 골을 낚아챘고 프랑스의 미셀 플라티니나 이탈리아의 졸라, 델 피에로는 중요한 순간마다 프리킥을 통한 득점에 절대적으로 기여해 왔다.
이러한 정지볼 득점은 필드골 못지않은 스릴을 제공하는데, 간접 프리킥 중 가장 절묘한 것 한 가지를 상기해 보자. 98년 프랑스월드컵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16강전. 바티스투타와 시어러가 한 골씩 페널티킥을 주고받고 마이클 오언의 저 유명한 솔로 액션이 펼쳐지고 난 후의 일이다. 잉글랜드 진영 아크 약간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은 아르헨티나의 바티스투타는 그대로 때릴 것과 같은 페인트 모션을 취하다가 바로 뒤 베론에게 백패스, 베론은 이미 앞쪽으로 쏠린 수비진 뒤로 침투한 자네티에게 정확히 밀어주자 그대로 논스톱 슈팅, 승부는 2 대 2가 되고 말았다. 전 세계의 축구팬들이 경악해 마지않았던 콤비네이션 프리킥의 정수였다. 그것도 성질 급한 아르헨티나가 그토록 정교한 세트 플레이를 전개했다는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전반이 끝나자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 왈, “당신은 이렇게 재미난 전반전을 본 일이 있는지요?”
2006 독일월드컵을 앞둔 한국 대표팀에선 약간 중장거리는 이천수가, 가까운 거리는 박주영이 프리킥을 다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바람직한 앙상블이다. 사실 프리킥의 낙차가 엄청나게 예리하게 굴절되는 것은 국내의 경우 고종수가 최고인데, 박주영의 경우 아직은 좀 더 세련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간 마음고생을 어지간히 한 이천수는 예전에 비해 상당한 정확도를 기하게 된 점이 가상하다. 반드시 골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리고 반드시 커브의 각도나 속도가 출중하지 않더라도 골키퍼는 일단 골대 안쪽으로 빨려 들어오는 볼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의 프리킥 전문가를 지안프란코 졸라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떻게 프리킥을 정교하게 차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가요, 마라도나에게 배웠거든요….” 이천수나 박주영에게 있어 그 스승은 누굴까? 혹시 고종수?
2002월드컵대표팀 미디어 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