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프 케이블과 박세리. | ||
‘골프 여왕’이란 타이틀로 인해 누구보다 힘든 숙제와 책임감을 지고 살았던 박세리. 또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울고 웃고 눈물 흘렸던 아버지 박준철씨. 어느 부녀지간보다 ‘희생’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두 사람 이야기가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 내달린다.
2006 미LPGA가 개막됐다. 개막전인 SBS오픈대회에선 김주미가 우승을 차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SBS오픈과 필즈오픈대회에 세리가 불참한 이유에 대해서 물어오는데 특별한 건 없다. 그저 하와이와 세리와는 인연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이상하게 하와이에서 열린 대회는 죽을 쒔다. 성적이 안 나온 다음부터 세리는 하와이에 가지 않았다.
세리의 골프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캐디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지금까지도 세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캐디가 미LPGA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제프 케이블일 것이다. 워낙 큰 체격으로 인해 별명이 ‘트리’였다. 힘들고 외로운 시절 제프를 만난 세리는 그 사람한테 많은 걸 의지했다.
그러나 난 제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프는 골프에 대해 잘 몰랐다. 다른 선수의 캐디들은 경기 당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코스를 한 바퀴 도는 것은 물론 다른 선수들 시합까지 챙기며 메모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프는 기본적인 일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골프백 메고 세리를 쫓아다니며 것뿐이었다.
98년인가 99년인가. 어느 대회에서 세리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제프가 펄쩍펄쩍 뛰고 난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캐디가 선수보다 더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세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트린지 뭔지 쟨 뭐냐? 지가 골프쳤어? 엉?”
캐디를 교체하자고 얘기했는데 세리는 강하게 반대했다. 지금 당장 캐디를 바꾸면 생활하는데 너무 외로울 것 같고 자기가 제프를 버리면 당장 직업을 잃게 된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 콜린 칸과 박세리. | ||
그러나 이번엔 너무 나서서 문제였다. 세리가 퍼팅 전에 라이를 살피려면 칸이 더 깊게 엎드려 라이를 살피거나 그린 사정을 살폈다. 처음엔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세리에게 조언하는 강도가 캐디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중엔 세리가 칸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실수가 계속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리를 불러 놓고 야단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이 대충 이랬던 것 같다.
“골프는 혼자하는 운동이야 세리야. 누가 대신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라구. 근데 왜 그놈한테 모든 걸 의지해. 걘 네 보조원일 뿐이야. 95%는 네 위주로 가야 한다구. 지가 선수야 뭐야. 계속 끌려 다니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아마도 칸의 입장에선 아버지인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부분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엔 칸의 지나친 간섭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결국 이런 잡음으로 인해 칸은 4년 만에 세리 옆을 떠나게 된다.
솔직히 칸이 먼저 떠났는지, 우리가 떠나게끔 분위기를 조성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칸은 미국 선수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폴라 크리머한테 옮겨갔다. 지금 세리는 스윙코치인 톰 크리비의 친구인 에릭 터스칸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선수를 안정시키는 심리적인 뒷받침이 탁월해 보여 마음이 든든하다.
난 세리의 은퇴 시기를 30대 중반 이후로 잡고 있다. 물론 오랫동안 골퍼로 활동할 수 있겠지만 그 시기 이후엔 골프로 인해 못해본 사람다운 생활, 여자다운 생활을 맘껏 누리게 해주고 싶다. 결혼도 해야하고 골프로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세리의 우승보다 후배들의 우승과 성장을 더 챙겨주고 그 바탕을 만들어줘야 하는 위치가 아닐까.
<일요신문>에 ‘별들의 탄생 신화’를 연재하면서 많은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내 과거와 힘들게 뒷바라지한 성장 스토리가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 같다. 아직 끝이 아니기에 이번호를 ‘마지막’이라고 규정짓고 싶지 않다. 은퇴할 때가 진짜 ‘마지막’인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세리한테 그동안 한 번도 표현 못했던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세리야, 올 시즌 재기에 대한 부담 절대 갖지 마라. 우승을 할 때도, 또 우승을 못할 때도 널 끔찍이 아끼는 가족들이 있잖아. 세리야 사랑한다. 아빠는 네가 너무 너무 자랑스럽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