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에 부상까지… ‘4강도 기적’
# 출발부터 김 새다
지난 1월 3일이었습니다. 점심 잘 먹고 배 두들기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낭패스런 보도자료 한 장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삼성 김한수가 허리 부상 때문에 WBC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현대 박재홍이, 이어 삼성 박한이마저 부상이 낫지 않아 WBC 멤버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김동주(두산)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긴 하지만 김한수는 역대 드림팀의 충실한 3루 지킴이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박재홍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리틀 쿠바’로 불릴 만큼 국제대회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이구요. 박한이에 대해선 야구계 동료 선수들이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야구한다. 야구란 저렇게 해야 한다.’ 제 아무리 초절정 긴장 상황이라 해도 절대 위축되거나 떠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핵심 선수들이 줄줄이 빠졌으니 WBC 한국대표팀은 출발부터 김이 샌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해외파 지각 합류
대표팀이 공식 소집된 날은 지난 2월 19일. 일본 후쿠오카에 훈련 캠프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박찬호와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등 대부분의 해외파는 합류가 늦어졌습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소속 선수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스프링캠프에 들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죠. 봉중근과 구대성은 제때 도착했지만 나머지 해외파 선수들이 꾸물대자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손발을 맞추고 연습경기를 갖는 등 3월 3일로 예정된 대만과의 예선 첫 경기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 판국에 해외파의 합류가 늦어지자 코칭스태프의 한숨도 늘어만 갔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2월 25일을 전후로 해서 모든 선수가 모였다는 점이었습니다.
# 듬직한 김동주마저…
대표팀이 첫 승전보를 날린 3월 3일 대만전. 이번엔 대표팀의 오른손 주포인 김동주가 1루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가 왼쪽 어깨가 베이스에 걸리면서 뼛조각이 떨어져나가고 탈구가 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WBC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정규리그 전반기 출전이 불가능한 지경이 됐으니 난리가 났죠.
이번 WBC 대표팀은 이병규 이승엽 최희섭 이진영 등 좌타 라인이 풍성합니다. 반면 오른손 거포로서 중심 타선에 포진할 수 있는 인물은 김동주 정도가 유일했죠.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타격감이 가장 좋았던 오른손 타자 홍성흔 역시 오른 팔꿈치와 발목 부상으로 실전 투입이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3월 5일 일본전을 어떻게 치를지 암담했죠. 게다가 애초 목표였던 4강 진입은 아예 물 건너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당시 이렇게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거기서 왜 슬라이딩을 하냐구. 1년에 한두 번 하지도 않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왜 WBC에서 했다가 다치는 거냐구!” 모 코치는 “왜 오버를 해서 다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모두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이었겠죠.
# WBC는 짐이다?
2라운드를 대비한 애리조나 피닉스 캠프에서 미묘한 기류가 포착됐습니다.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번 WBC를 ‘어쩔 수 없이 불려나왔지만 그다지 인센티브가 없는’ 대회로 여기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느 정도 성적이 나면 모르겠지만 괜스레 8강 탈락이라도 했다가는 비난에 시달려야 하니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김동주의 경우처럼 만약 큰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선수 개인에게 이만저만 손해가 아닙니다. 한 선수는 “후배들 병역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다는 생각만 아니라면 크게 반갑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2라운드의 상대국은 멕시코, 미국, 일본이었죠. 선수단은 ‘과연 우리가 4강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분위기였습니다.
#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
멕시코를 깨고, 미국을 무릎 꿇리고, 일본 선수들을 울리며 ‘팀 코리아’가 4강에 진출했습니다. 야구 종주국임을 자부하며 콧대가 높았던 미국의 언론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선수들인가”라고 되물으며 한국의 경이적인 연승 행진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전까지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습니다. 주요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졌지만 대체 선수들은 공백을 메울 만큼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종범이 2라운드 일본전서 승리한 뒤 “한국에 남은 선수들 중 실력이 더 좋은 선수들도 많다”고 자신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국 야구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으니 몇 명의 부상 공백이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해외파는 캠프에 지각 합류했지만 이미 철저하게 몸을 만들어놓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자칫 오버페이스하게 되면 정규 리그를 망칠 수도 있는 서재응 김병현 박찬호 등 선발 투수들도 WBC를 위해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놓았음이 경기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어깨를 다친 김동주는 깁스를 한 채 더그아웃에서 한 손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동료들을 격려했죠. 뛰지 못하는 심정을 동료들에게 보내는 함성으로 대신했습니다.
젊은 선수들도 막상 2라운드가 시작되자 병역혜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WBC가 짐이라고 했던 모 선수도 펄펄 날았습니다.
이종범은 “태극기를 든 교민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북받쳤다. 한국에서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대표팀 멤버들은 손익 계산서를 따지는 프로 선수이기 이전에 순수한 열정을 가진 애국자들이었습니다. 에인절스타디움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 서재응의 모습에서 더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미국 샌디에이고=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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