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유에서 활약하는 박지성. 로이터/뉴시스 | ||
지성이가 맨유에 입단할 때만 해도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아니 더 이상 이룰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담으로 잔뜩 얼어 있는 지성이한테 못해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즐겁고 재미있게 축구를 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막상 게임을 보러 다니면서 그건 순전 착각이었음을 절감했다. 입단 초기에는 퍼거슨 감독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좋은 플레이를 펼쳐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고 조금씩 적응이 되고 있는 지금에는 골도 펑펑 터트리고 평점도 7점 이상 받아 속을 시원하게 뚫어줬음 하는 바람도 생겨 버렸다. 한 경기, 한 경기에 너무 많은 관심과 반응들을 나타내니까 지성이와 나, 그리고 아내는 심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런 ‘증상’들은 지성이가 축구를 그만둘 때나 해소될 듯하다. 지성이가 K-리그에서 뛰든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든 선수로 활약하는 동안에는 하루도 다리 뻗고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옛날 얘기로 돌아가 보자.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운동하는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악’은 선배들의 구타다. 지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배들한테 죽지 않을 만큼 맞고 다녔다. 물론 혼자만 맞은 게 아니다. 대부분 단체 기합이었기 때문에 억울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난 지성이가 그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몰랐다.
▲ 그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이다. | ||
그러나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내 아들이 매 맞고 운동한다는 소리에 마음이 갈가리 찢겨지는 듯 했다. 그렇다고 당장 학교로 쫓아가 감독한테 항의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지성이는 게임에서 진 날은 결과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늘 저녁에 또 맞겠구나’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더 컸다고 나중에서야 고백했다. 언젠가 지성이가 이런 말을 했다. “아빠, 매 맞지 않아도 운동할 애들은 다 해요. 운동이 절실한 선수들은 안 맞아도 다 열심히 하거든요.”
지성이한테 가장 미안한 게 용돈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 형편에 지성이 뒷바라지하면서 용돈까지 챙겨주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다른 부모들이 선수들한테 용돈을 건네주는 모습을 보며 그냥 못 본 척하곤 돌아섰는데 보다 못한 지성이 엄마가 따로 쥐어줬던 모양이다. 동료 선수들은 용돈이 적다고 부모 앞에서 화를 내기도 했지만 지성이는 설령 돈 한 푼 받지 못해도 절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물론 아내가 조금씩 챙기긴 했어도 그 액수가 미미했기 때문에 용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수원공고 시절 하루는 토요일 외박 나온 지성이가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우리팀 선수 중에 20만 원짜리 옷을 샀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20만원이면 추리닝이 몇 벌인데? 선수가 추리닝이면 됐지 무슨 사복이 필요해요?”
맨유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성이는 지금 이렇게 말한다. “아빠, 옛날에 20만 원짜리 옷 산 친구 흉본 거 기억나세요? 헤헤 제가 그런 옷을 입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요. 정말.”
글을 쓰다 보니 마치 지성이에 대한 아버지의 ‘반성문’이 된 것 같다. 말을 꺼낸 김에 한 가지 더 미안한 얘기를 전하겠다. 내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긴 해도 지성이를 키우면서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 워낙 속이 깊은 아이라 나를 자극하는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지성이가 아버지와 약속한 귀가 시간을 훌쩍 넘겨서 밤 12시가 다 돼 집에 들어오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난 친구와 함께 마루에 올라서는 지성이를 세워놓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같이 온 친구는 화난 내 모습에 겁을 먹고 그냥 도망치고 말았다.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늦었을 뿐인데 약속을 어겼다며 난리를 쳤던 내 모습은 결코 아버지 ‘답지’ 않았다. 그래도 지성이는 군말 없이 모든 걸 받아들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참 못할 짓을 했던 것 같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