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일본전 후 환호하는 관중들과 선수들. 로이터/뉴시스 | ||
8강만 올라도 다행이라던 한국 야구가 명실상부한 야구 최강 국가를 가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6전 전승으로 4강에 오르는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 아시아 예선과 본선 라운드에서 일본을 연파한 것은 그렇다 쳐도 메이저리그 스타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미국까지 큰 점수차로 제압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비록 19일 4강전에서 일본에 석패를 당하긴 했지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휘몰아친 한국 야구의 돌풍은 메이저리그 심장부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과거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는 한국의 운동 선수들은 온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잘 버티다 무너질 때면 “고기도 못 먹고 잘 먹지를 못해 힘이 모자란다”며 안쓰러워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이기면 “먹지도 못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라고 자신의 아들 딸이 이긴 것처럼 대견스러움에 가슴 벅차했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진입을 눈앞에 둔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의 면면은 과거와 다르다. 서양 선수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당당한 체격에 잘 먹어 뽀얀 피부는 언뜻 보면 한국 선수인지 서양 선수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그럼에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고등학교 야구 팀이라곤 기껏해야 전국에 50여 개. 11월이면 삭풍이 불어 야구를 할 수 없는 계절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고 돔 구장은 물론이고 변변한 실내 훈련장도 찾아볼 수 없는 게 한국 야구의 현실이다. 야구의 나라 미국과 일본. 한국이 그들을 누를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때 그들에 비해 여전히 배가 고픈 선수들의 투지를 빼놓고는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리고 한국 선수들의 잠자고 있는 근성의 바닥을 긁어 자극한 것은 바로 김인식 감독의 놀라운 투혼이었다.
2004년 겨울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인식 감독은 아직도 재활 중이다. 예년에 비해 쌀쌀하기는 하지만 결코 춥다고 할 수 없는 캘리포니아 날씨. 여전히 뇌경색의 후유증과 싸우고 있는 김인식 감독은 두꺼운 솜 장갑을 끼고 대회를 지휘해야 했다. 혈액 순환에 장애가 생겨 발병하는 뇌경색에 차가운 날씨는 ‘적’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기온을 예상하고 대표팀은 가벼운 점퍼를 준비했지만 일교차가 심한 캘리포니아에서의 야간 경기는 10월 말 치러지는 한국에서의 포스트시즌 경기 못지 않았다. 혈액 순환에 좋다고 해 한국에서 준비해온 ‘현미 식초에 절인 검은 콩’도 오랜 훈련과 대회 기간 도중 바닥이 났지만 김인식 감독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언론과의 인터뷰는 건강한 사람도 소화해내기 힘든 강행군이었다.
장수의 투혼은 부하 장병들을 감동시켰다. 주장 이종범은 경기에서 빠지기를 바랄 정도로 심한 몸살 감기에 시달렸지만 멕시코전에 출장했고 그의 투지는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단단한 동아줄이 됐다.
대회가 단기전이라는 점도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팀 수가 적고 단기 토너먼트 대회가 많은 아마추어 야구 구조상 한국 선수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수한 단기전을 치르며 적응해 왔다.
▲ 일본과의 16일 경기에서 3루수 이마에의 볼이 빠지면서 김민재가 세이프되었다. 이에 분위기가 상승한 한국팀이 2 대 1 승리를 거뒀다. 비록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했지만 한국의 돌풍은 WBC 최고의 화제가 되었다. 로이터/뉴시스 | ||
선발 투수지만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다 다시 선발 투수로 등판한 박찬호, 올 시즌 소속팀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4선발로 활약해야 하지만 계속되는 불펜 등판을 마다하지 않은 김병현이 모두 한마음이었다.
박찬호, 김병현 등 메이저리거들의 존재는 한국의 젊은 선수들이 유명한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주눅 들지 않게 하는 면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처음 애리조나에 도착한 뒤 체이스필드에서 벌어진 미국과 멕시코의 경기를 관전했다. 조범현 배터리 코치는 “어느 팀이 해볼 만하겠느냐”는 질문에 “우리 팀이 해볼 만한 팀이 어디 있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미국, 멕시코와 본선 2라운드에 진출했을 때 한국 코칭스태프는 내심 아시아 예선에서 승리한 일본과 멕시코는 해볼 만하고 미국은 힘들지 않겠느냐는 분위기를 보였다.
일단 가장 믿음직한 메이저리거 서재응과 박찬호를 멕시코와 일본전 선발로 내세우고 국내파 손민한을 미국전 선발로 내세운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선수들 역시 일본과 멕시코전에 관한 언론의 질문에는 “반드시 이기겠다”라고 말하면서도 미국에 대한 경기 전망을 말할 때에는 달랐다.
미국 선수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들과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한국팀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은 그대로 배어나와 김인식 감독조차 미국전에서 승리한 뒤에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신 기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특히 한국 야구를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일본 기자들의 반응은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한국 야구에 대해 미안함이 들게 할 정도였다. 17일 일본과의 경기가 끝나자 일본 <산케이 스포츠> 오자와 겐이치로 기자는 한국 기자들을 향해 ‘축하한다’며 말을 건넸다. 그는 “이미 아시아의 챔피언은 한국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기자가 김인식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아직은 한국이 일본에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NO)’라는 단어를 예닐곱 번이나 반복했다.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가 벌이는 ‘슈퍼 게임’을 두 번이나 취재했다고 밝힌 또 다른 일본 기자는 한국이 일본을 연거푸 누른 것에 대해 “결코 놀라지 않았다”며 “이번 대회가 아니더라도 이미 한국 야구는 일본과 대등한 수준”이라고 단정 지었다. <댈러스 모닝뉴스> 메이저리그 담당 기자 제리 프레일리는 “한국이 우수하다는 것은 일본을 이겼다는 사실이 증명하며 그동안 한국 야구에 대한 평가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세 번째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에 석패하긴 했지만 국제무대에서 한국 야구의 실력은 현저히 과소평가됐다는 사실이 이번 대회를 통해 증명됐다.
하지만 한국 야구의 현실은 여전히 한국이 가장 잘 안다. 두 번이나 일본을 격파한 김인식 감독이 여전히 일본 프로야구에 대등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한국 야구의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
한국은 이번 대회 최고 돌풍의 주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 야구가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미녀인지, 하룻밤 신데렐라에 불과한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앞으로가 더 중요할 뿐이다.
샌디에이고=김성원 중앙일보 JES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