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월드컵 8강전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 도중 히딩크 감독이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보이고 있다. 최근 러시아 대표팀을 맡게 된 히딩크 감독이 어떤 활약을 보일지 기대된다. | ||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들의 비교는 물론이고 대표팀 감독들의 출사표와 호언장담 등도 언론의 짭짤한 기사 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본선 개막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벌써부터 월드컵 이후의 지휘봉 이전 문제가 각국에서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예컨대 잉글랜드의 에릭손 감독이 경기 외적인 일로 잡음이 많긴 하지만 이 중대한 월드컵이 시작도 되기 전에 대표팀 감독의 경질 문제가 공공연하게 확산되고 있음은 조금 생경한 일면이다. 에릭손 감독의 후임에는 브라질의 스콜라리(현 포르투갈 감독) 등이 거론되고 있다. 히딩크 감독 역시 물망에 올랐다가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오만방자한 접근방식(여러 명의 감독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테스트하는 형식)에 불만을 품고 결국 러시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여튼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월드컵 본선 전에 미리 에릭손의 후임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는 별로 익숙지 않은 관례지만 유럽에서는 종종 있어 왔다. 98프랑스월드컵대회 직전 유벤투스를 누르고 무려 32년 만에 챔피언스컵을 쟁취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은 독일인 유프 하인케스였다. 우리 식이라면 유럽 최고봉의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히 유임될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구단은 그해 시즌 리그 우승을 바르셀로나에게 빼앗겼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해고했다. 그것도 결승을 앞두고 ‘우승하더라도 당신을 자르겠소’라는 사전 통보까지 하면서 말이다. 중요한 시합 이후 본인이 실직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결승전을 제대로 치를 수 있었을까. 결과는 미야토비치의 결승골로 그해 시즌 가장 탄탄한 조직력을 선보였던 유벤투스를 울렸다. 하인케스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기고도 쓸쓸히 퇴장했고 이후 빅 클럽을 맡아 언론에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 클린스만(왼쪽), 퍼거슨 | ||
여기에는 이러한 해석이 있었다. 대개 유럽에는 클럽과 대표팀 감독직을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생각해 보자. 맨유의 화신 알렉스 퍼거슨이나 AC밀란, AS로마, 유벤투스 등 일류만을 거친 귀재 파비오 카펠로, 바르셀로나에게 최초로 유럽챔피언스컵을 안겼던 요한 크라이프 감독 모두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경력이 없다. 반대로 독일의 포그츠, 쾰러, 클린스만은 클럽 경력이 전무한데도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에 앉았다. 이런 구도 하에서는 비록 히딩크 감독이 반에서 40등 이하 성적의 애들을 서울 사대문 안 대학에 합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의 클럽 운영 능력에 대해서는 큰 점수를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즉 하위팀을 상위권에 진입시키는 데는 탁월하나 일류팀을 계속 일류에 머물게 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 부호를 남겼다는 설명이다.
히딩크 감독은 88년 에인트호번을 이끌고 유럽챔피언스컵을 안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세계적 명장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자주 들먹이지만 사실 6개월 정도의 체류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로 때운 호주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이 나라를 32년 만에 본선 무대에 올려놓자 드디어 ‘히딩크 매직’이 진짜 사실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로 타전되기 시작했다. 베켄바우어마저 그를 세계 최고 수준의 감독으로 칭찬했고 전술면에서는 현재 세계 랭킹 톱 5위 안에 드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히딩크=2002월드컵 4강’이라는 등식은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니 우리로서는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 이번 대회에서도 그와 호주팀의 선전을 기원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아시아 축구(호주는 차기 대회 때부터 아시아 지역예선을 거친다)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기를 기대해 보자.
물론 양쪽을 다 소화하면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넓힌 인물도 존재한다. 잉글랜드가 파격적으로 스웨덴 출신의 에릭손을 자국 감독으로 영입한 것은 외국 감독들의 무덤이었던 세리에 A에서 라치오에게 스쿠데토(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걸 의미)를 쟁취하게 했던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탈리아 리그에서 성공한 외국인 감독은 에릭손이 유일한 케이스다.
히딩크 감독 역시 그러한 두 개의 정상을 넘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박지성과 이영표를 데리고 올림피크 리옹과 AC밀란을 혼내주던 장면들을 생각하면 히딩크 감독은 에인트호번보다는 좀 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히딩크가 잉글랜드 대표팀이나 맨유의 감독직을 맡게 되기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결국 러시아로 귀착되고 말았다.
하여튼 히딩크, 잘 하시오, 우리가 조건 없이 응원할 테니….
2002월드컵대표팀 미디어 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