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아공으로 떠나는 인천공항에서 만난 최용수. 그는 아프리카에서 격투기 훈련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K-1 진출을 발표한 이후 최용수는 운동을 못했다. 정확히 표현해서 ‘안했다’라고도 할 수 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격투기 체육관에 나가 체력 훈련과 기본기 배우기에 노력을 했지만 얼마 못가 혼자 훈련을 하겠다면서 체육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소속사 T-엔터테인먼트의 양명규 대표가 남아공 전지훈련을 제안했고 최용수가 받아들임으로써 출국을 하게 된 것이다.
최용수는 인천공항에서 기자 앞에 마치 1박 2일 여행가는 학생인 양 작은 배낭 가방 하나만 들고 나타났다. 큰 짐은 따로 보관했거나 이미 출국 수속을 마친 걸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터뷰가 끝난 뒤 “짐은 어디 있어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최용수 왈, “이게 제 짐인데요?”하면서 들고 있던 배낭 가방을 내보였다. 기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최용수가 이렇게 덧붙인다. “격투기가 뭐 장비가 필요한 가요? 신발도 필요 없잖아요. ‘빤스’만 있음 되는 거지.”
격투기 진출을 선언한 뒤 기자와 ‘취중토크’를 가졌던 최용수는 그때 이렇게 귓속말을 던진 적이 있었다. “제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예요? 어휴 오늘 여기(기자회견장) 나오는데 마치 도살장에 끌려오는 기분이었다니까.”
공식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최용수가 K-1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이 필요했고 일자리를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던 차에 K-1에서 ‘러브콜’을 보내 손을 잡긴 했지만 복서로서의 자존심이 그의 K-1 진출을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열흘 동안 아주 짧게 격투기 훈련을 해본 최용수에게 복싱 훈련과 격투기 훈련의 차이점을 물었다. 역시 현답이 돌아온다. “복싱은 위만 보고 했지만 격투기는 위 아래를 다 봐야 한다는 게 아주 다르죠.” 그러면서 “뭐, 운동을 해봤어야 알죠. 그렇잖아요. 3개월 동안 10일 운동한 것 같고 격투기가 어쩌네 저쩌네 말 하는 것도 우스워요.”
최용수의 측근에 의하면 복싱하면서 익숙하고 친숙해졌던 극동서부체육관에서 새롭게 격투기 체육관으로 환경이 바뀐 부분이 최용수를 힘들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개별 훈련을 내세우며 더 이상 격투기 체육관을 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측근은 최근 최용수가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고 귀띔해줬다. 그 ‘아픔’의 실체가 궁금했다. 대답 짧기로 유명한 최용수는 이에 대한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만 내비쳤다.
최용수는 아직 한 게임도 뛰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격투기에 대해 감을 잡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기자가 그럼 6월 3일 열리는 K-1 그랑프리 서울대회에서 데뷔전을 치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싫어요. 지면 어떡해요? 뭐 팔리잖아요. 진다고 생각하면 아예 처음부터 게임을 포기해야죠.”
지난 2월 25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K-1 대회를 처음 관전했었다는 최용수에게 소감을 묻자,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이렇게 반응한다.
“참으로 특이한 종목이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선수가 입장할 때 춤추면서 들어오질 않나, 결국 걔 졌잖아. 무게 잡고 천천히 들어오면 되지 (춤추는 동작을 해보이며) 이게 뭐예요? 이기면 괜찮아. 지면 ××지.”
개인적인 아픔으로 운동하는 데 지장을 받으면서도 최용수의 마음 한 구석엔 빨리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여전히 운동하는 게 돈 때문에 하는 거지만 어설프게 지거나 변변치 않은 모습으로 최용수의 이미지를 구기고 싶진 않다는 의지도 있었다.
“전 운동이 재미없어요. 맞는 걸 재미있어하는 놈 있겠어요? 복싱 처음 할 때는 재미있었죠. 그 이후론 별루더라구요. 그런데 희망이 생겼어요. 세계 챔피언이 되고 싶다는. 챔피언 돼서는 또 하기 싫었는데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계속 해나갔던 거예요. 지금요? 지금도 재미없죠. 하지만 선택한 이상 복싱 선수의 자존심만은 잃지 말아야 하잖아요.”
어떤 인터뷰보다 단답형으로 진행되는 통에 기자가 푸념을 늘어놓자 최용수가 이렇게 툭 던진다.
“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직장 생활하면서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과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복싱 선수가 되고 나선 그런 희망이 사라졌죠. 남들이 보기엔 배부른 소리 한다고 그럴 거예요. 제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이젠 뭐 다 끝났지.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달려 왔으니까. 남아공에서 못다한 훈련 다 보충해서 올게요. 한 번 ‘올인’해 보려구. 이종격투기에요.”
최용수는 남아공 케이프타운 스티브 체육관에서 프랑소와 보타 등 남아공 출신의 유명 종합격투기 선수들을 지도하는 스티브 칼라코다 트레이너에게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출국 전날 환송식에서 지인들이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동정 어린 표정을 지어 재미있었다는 최용수는 여권만 손에 들고 맨 몸으로 입국장을 향해 들어갔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