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3년 에인트호번 소속으로 피스컵 대회에 나선 박지성. 그는 히딩크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네덜란드로 갔지만 낯선 유럽 생활 적응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 ||
히딩크 감독이 직접 한국에 들어와 지성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지만 솔직히 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당시 하얏트 호텔에서 우연히 히딩크 감독과 마주칠 수 있었는데 그가 나를 향해 윙크를 보냈던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월드컵 스승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기도 힘들었지만 정이 푹 든 일본을 떠나기는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특히 지성이가 낯선 유럽 문화에다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건 또 다른 스트레스를 안겨줄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월드컵 이후 계속되는 J리그 경기로 인해 지성이의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무모한 도전을 꿈꾼다는 게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PSV 에인트호번 측에서 상상 외의 적극성을 띠었다. 이적료에다가 없는 계약금까지 만들어주겠다고 나서는 데 그것마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때 지성이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가야할 것 같아. 아마도 가야할 운명인가봐.” 그 얘길 듣고 지성이 엄마는 절대로 가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만류했는데 지성이가 ‘운명론’을 내세우며 고집을 피웠다.
▲ 히딩크 감독과 박지성 | ||
20일 정도 지나서 (이)영표가 에인트호번에 합류하기 전까지 지성이는 말 그대로 넓은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무인도처럼 삭막하고 외로운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히딩크 감독과 2군 감독으로 있는 핌 베어백 코치가 여러 가지로 배려를 많이 해줬다.
고생은 지성이뿐만이 아니었다. 편한 일본 생활에 젖어 있던 나와 아내는 생전 처음 접하는 유럽 문화가 충격의 연속이었다. 통역이 있었지만 생활면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화폐에 익숙지 않아 마트에 갈 때마다 지폐만 내는 바람에 나중에 동전만 따로 담을 가방이 필요할 정도였다.
하루는 일요일 아침에 지성이가 콜라를 애타게 찾았다. 일요일만 되면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데 어디서 콜라를 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치는 생각! 곧장 기차역으로 향했고 역내에 있는 자판기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때만큼 내 자신이 흐뭇하고 기특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국제대회에서 메달 따고 금의환향한 것처럼 콜라를 양 손에 들고 집에 들어갈 때의 그 뿌듯함이란….
하지만 생활하면서 겪는 고달픔은 이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바로 에인트호번 팬들의 야유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국내에선 감히 상상도 못했던 야유와 비난이 홈구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특히 지성이가 볼이라도 터치하려면 ‘우~’하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 자식이 누구한테 욕 먹는 걸 좋아하는 부모가 있을까. ‘너 공 이것밖에 못 차냐!’ ‘지송 빠르크 빠져라!’ ‘××, 당장 못 나와!!’ 등등 맥주캔을 집어 던지며 항의하는 관중들 틈에서 우린 한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들과 한판 붙고 싶었다. 그러나 동양인이라곤 달랑 나와 아내밖에 없는 상황에서 돌출 행동을 벌였다간 그 화가 모두 지성이에게 돌아갈 것 같아 꾹꾹 눌러 참느라 나중엔 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경기를 보고 오면 꼭 아내와 부부 싸움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지성이마저 부상을 당하고 수술을 받게 되는 등 힘든 상황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쯤되면 네덜란드 생활이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