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진출 두 번째 해인 2005년 연말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에서‘특별상’을 받는 모습. 일간스포츠 | ||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체육대회 때 공 던지기 시합이 있었는데 승엽이가 가장 멀리 공을 던졌다. 그걸 초등학교의 야구부 코치가 눈여겨본 모양이다. 승엽이를 따로 부른 야구부 코치는 야구를 같이 해보자고 설득했고 나중엔 우리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난 결사 반대했다. 그 코치가 집에 오는 걸 피해 도망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승엽이는 다른 생각이었다.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날 찾은 승엽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선 무조건 야구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야구만 하게 해준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태도였다.
나와 아내는 막내를 운동 선수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승엽이에게 운동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운동한다고 해서 모두 다 성공하고 훌륭한 선수는 될 수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러나 승엽이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절대로 엄마, 아빠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덧붙인 한 마디에 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건 알겠지만 야구 때문에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승엽이의 야구 인생은 실크로드였다. 투수로 활약한 승엽이는 투타에서 골고루 좋은 성적을 냈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 압권이 대학 진학 때였다.
난 승엽이가 대학에 들어가길 바랐다. 마침 한양대에서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왔고 그들의 지극 정성에 난 한양대로 마음이 기울었다. 승엽이가 고등학교 때 너무 혹사를 당하는 바람에 팔이 성하지 않았다. 그대로 프로에 갔다가는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릴 것 같아 프로행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다. 그런데 삼성 측에서 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게 나와도 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중엔 승엽이를 붙잡고 ‘작업’을 벌였다. 그래도 난 대학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구 선수의 생명이 짧기 때문에 대학에서 야구 외적인 부분을 많이 보고 배우기를 희망했다.
▲ 지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우승한 뒤 이승엽이 기뻐하고 있다. | ||
한양대에선 삼성의 움직임을 의식해 사람을 따로 붙여서 승엽이의 시험장까지 동행했다. 그런데 ‘순둥이’ 승엽이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시험을 1시간만 치르고 감시의 눈을 피해서 인근 당구장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나는 승엽이를 무섭게 질책했다. 그때 승엽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게요. 프로에서 정말 열심히 할 테니까 믿고 지켜봐주세요.”
그때 항간에는 승엽이가 수능 시험의 점수 미달로 한양대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시험 결과가 나빠서가 아니라 중도 포기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프로에서 ‘국민타자’의 칭호까지 거머쥔 승엽이는 또 다른 도전을 꿈꿨다. 바로 메이저리그 진출이었다. 결정하기까지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주위의 반대로 승엽이의 맘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삼성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알아보면서 승엽이는 며느리와 함께 LA다저스를 방문했다.
그러나 승엽이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난 그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승엽이 엄마는 아파서 누워있지, 자식은 미국에 간다고 했다가 험한 꼴만 당했지…. 그냥 삼성에 잔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한가득이었다. 승엽이 때문에 야구계 전체가 시끄러워진 것 같아 도통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2~3일 동안 극도의 방황과 갈등, 고민 끝에 승엽이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일본행을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으로 향하기 직전 승엽이는 내게 전화해서 일본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난 이번에도 크게 반대했다. 명색이 ‘국민타자’가 일본에서 활약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승엽이는 또 다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상하게도 난 승엽이한테서 그 말만 들으면 마음이 약해진다. 지금까지 세 차례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그 말들이 나왔는데 돌이켜보면 승엽이의 결정을 못 이긴 척 하고 믿어줬던 게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 같다. 물론 일본 진출 첫 해, 승엽이가 재팬리그에서 ‘박살’났을 때는 좀 더 세게 만류하지 못한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지만 말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