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에 패한 후 눈물을 흘리는 이천수. 연합뉴스 | ||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 소위 축구 초강대국들의 경우는 판정을 편파적으로 해도 영향을 덜 받지만 아직 우리의 실력은 그러한 농간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건한 것이 아니다. 이래서 축구의 판정은 항상 시빗거리가 된다. 나는 펠레와 보비 무어가 나온 <승리의 탈출>이란 영화에서 나치 독일팀을 편드는 스위스 주심의 편파 판정 이래 이토록 철저한 ‘판정 테러’는 본 적이 없다.
이미 ‘어제 내린 눈’이 돼 버린 스위스전이지만 회한이 많이 남는 한국팀의 마지막 경기에 대해 다시 한 번 리플레이 해보자.
아무리 곱씹어 봐도 스위스와의 후반전은 대표팀이 지금까지 보여준 경기 중 최고였다. 독일 현지의 어떤 전문가는 금번 대회 최대의 격전장이었다며 그 격렬함을 높이 평가했다. 전술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오른쪽 윙백을 담당했던 이영표를 교체시킨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으며 어차피 총공세를 펼쳐야 할 시점에 여전히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이나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프랑스전 후반에 멋들어진 대시를 보여준 설기현은 이 날만은 몸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미드필더의 전진 배치도 좋지만 차라리 정경호 등 공격수를 총출동시키는 무리수를 뒀다면 어떠했을까.
박지성이나 이천수한테선 원톱 조재진의 헤딩패스를 받아내 곧바로 페널티 구역으로 쇄도하는 적극적인 플레이가 아쉬웠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3-4-3 시스템은 원톱의 활용도에 대한 세세한 전술 훈련에 문제점이 노정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비라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인지했던 부분이라 다시 재론할 여지는 없지만 그로 인해 미드필더들이 과감한 공격 가담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박주영의 선발 기용은 누구라도 생각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몸싸움에 불리한 그가 월드컵 본선에서 임팩트를 주기에는 아직 경험이 일천함을 즉각적으로 드러냈다. 이건 감독의 전술상 문제가 아니라 선수 기량의 한계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 스위스에 패한 후 아쉬워하는 조재진. 연합뉴스 | ||
이천수가 누군가. 시드니올림픽 때 과격한 성질을 감당 못해 퇴장당한 장본인이 아닌가. 이날 천수가 터트린 울음은 본인의 억울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데 기인하는 것이나 아마도 우리 국민 모두를 대신해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절규는 결국 K-리그를, 축구를 더 사랑해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1년여 그와 함께 생활한 탓에 특별히 남다른 감회가 있다. 축구선수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차원에서 새삼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순간을 연출했다.
우리에게 있어 이번 월드컵은 어쩌면 2002년 때보다 더 큰 기대와 환호 속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개최국을 능가하는 열기와 도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적인 그리고 절규와 다름 없는 응원 속의 대표팀을 보면, 마치 줄타기를 하는 듯한 스릴 넘치는, 그러나 마지막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듯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팔타커스>에 나오는 노예 검투사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침을 뱉는 얼치기 팬도 있지만 대표팀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진정한 팬이 이전보다 더욱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늘 뒤에서 삐딱한 시선으로 비평만을 일삼는 논객과 네티즌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축구 관계자(?!)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은 우리나라 축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어떤 매체는 ‘축구는 오늘(6·23) 죽었다’고 대성통곡했다. 이게 ‘시일야방성대곡’이라면 분명 우리에게는 머잖아 ‘해방’의 그날이 온다.
독일월드컵에서 우리는 지난 4강 신화의 체면을 살린다는 매우 소극적인 동기부여에만 집착한 것 같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는 경우의 수가 아니라 모든 적을 물리치겠다는 각오가 부족한 탓에 세 경기 모두 상대에 끌려 다니는 소극성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축구와 더불어, 월드컵과 함께 6월을 흥겹게 보냈다.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자. 이런 열정과 눈물과 땀과 피가 있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오늘 축구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002월드컵대표팀 미디어 담당관
현 독일대사관 참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