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MW 자동차를 갖고 싶었던 이승엽은 아버지가 반대하자 다음해에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최고 성적을 올린 뒤 차를 샀다고 한다. | ||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는 좌불안석이다. 힘든 상황을 잘 극복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마냥 좋은 내색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아들이 요미우리 10연패의 사슬을 끊고 올스타에 선발된 데다 6월 MVP까지 선정되는 등 겹경사를 맞이한 부분은 표현 못할 보람으로 느낀다.
사실 요미우리가 연패의 늪에 빠졌을 때 나 또한 많이 힘들었다. 승엽이에게 전화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승엽이의 안타와 홈런 소식도 잦아들었고 팀 분위기가 나락으로 떨어져 영 회생 기미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어렵게 터널을 뚫고 나온 것이다. 오랜만에 통화를 한 승엽이의 목소리가 예상대로 밝았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편히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선수와 선수 부모의 인생이 이렇다. 운동이 잘 되고 성적이 좋을 땐 무조건 ‘해피데이’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이 되면 아무리 돈이 많고 삶이 편안해도 마음이 무겁고 힘들어진다. 이젠 더 이상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해도 아들의 야구 인생에 발을 담근 이상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가끔 그리운 시절이 있다. 바로 삼성 선수 부모들과 함께 원정 응원을 다닐 때다. 양준혁 강동우 임창용 김진웅 신동주 등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들은 원정 경기에 다니는 고정 멤버들이었다. 나중엔 배영수 가족들도 합류했다. 서울 광주 부산 등 경기가 있는 날에는 봉고차를 빌려서 오고 가며 노래도 부르고 얘기도 나누며 참으로 즐겁게 이동을 했다. 어머니들이 준비한 김밥과 상추에 싼 고기 등을 휴게소에서 먹을 때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다.
한 번은 단체로 응원을 갔는데 표가 매진이 됐다(선수 가족들이라고 해도 ‘당연히’ 표를 사서 입장한다). 어쩔 수 없이 구단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경기장에 들어갔지만 자리가 없어서 경기 내내 서서 본 적도 있었다.
우리가 선수 가족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는 관중들 속에 함께 있다 보면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 선수에 대한 칭찬이야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선수를 비난하거나 심지어 욕을 퍼붓는 관중들이 옆에 있을 경우엔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진다. 내 아들이 일방적으로 ‘나쁜 ×’으로 매도당하는데 어느 부모가 가슴이 안 아프겠는가.
그때 동고동락했던 부모들…. 선수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고 군대에 가고 운동을 그만두면서 만남이 소원해졌지만 가끔 선수들 경조사 때 가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마치 잃어버린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운동 선수의 부모라는 공통 분모 하나로 한마음 한뜻이 됐다. 아들의 성적표에 따라 부모가 갖는 ‘심정적인’ 위치가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팀 성적이 좋거나 우승을 할 때는 네 아들, 내 아들 할 것 없이 모두 얼싸안고 기뻐하면서 그 감격을 누렸다.
1998년도의 일이다. 경산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친 승엽이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승엽이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아버지, 차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갔다. 차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면서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동대구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우리가 타고 있던 차 바로 앞에 BMW가 서 있었다. 그때 승엽이가 “아버지, 저 차를 꼭 갖고 싶어요. 내년에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내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하고 다짐하듯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좋은 성적을 낼 거냐?”고 떠봤더니 “겨울에 열심히 훈련하겠다”는 게 승엽이의 답변이었다.
BMW가 갖고 싶었는지, 아니면 야구에 대한 재미를 붙였는지 이듬해 승엽이는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차를 안 사줄 수가 없었다. 승엽이는 BMW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차를 원했지만 좀 더 형편이 나아지고 여유 있을 때 그런 차를 구입하라는 충고에 가장 가격이 낮은 차를 구입해야 했다. 지금이야 프로 선수들의 외제차 구입은 흔하디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국민타자’ 이승엽의 BMW 구입은 뉴스가 될 정도라 오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건 최근엔 야구 선수들의 차량을 지원하는 자동차 회사들이 많아져 차를 구입하지 않아도 탈 수 있는 차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