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가 다닌 명지초등학교에선 특별활동으로 여름에는 수영을,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가르쳤다. 현수는 어렸을 때부터 물을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했다. 그래서 여름에 수영을 배울 때는 도망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나 스케이트는 곧잘 탔다. 아니 아주 재미있어했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간 현수가 하루는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와선 이렇게 말했다. “아빠, 스케이트 개인 레슨을 받고 싶어요.” 단순히 학교의 특별 활동으로만 여기고 아무 생각이 없던 내게 현수는 취미를 넘어 특기로 스케이트를 타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반대를 했지만 현수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레슨을 시키면서도 솔직히 ‘좀 타다 말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현수의 스케이트 사랑은 깊어만 갔다. 4학년서부터는 아침 저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스피드 스케이트보다는 쇼트트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4학년 때 한·일 교환 경기로 일본에서 스피드 스케이트 대회가 열렸는데 현수가 처음으로 스피드 스케이트를 신고 대회에 출전해 3등을 차지한 일이 있었다. 현수보다 내가 더 놀랐다. 타보지도 않은 스피드 스케이트 대회에 이런저런 사연으로 출전하게 돼 3등을 차지해버리니 스케이트에 대한 현수의 천부적인 자질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그 후로 전국대회나 동계체전 등에서 현수는 쇼트트랙 분야의 독보적인 유망주로 떠올랐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메달을 휩쓸다시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스케이트를 그만타라고 종용했던 난 현수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더욱이 당시엔 현수를 뒷바라지할 만한 경제적인 여건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현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에게 다짐을 받았다. ‘시작은 맘대로 해도 포기는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서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생겨선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수는 자신있는 표정이었다.
난 현수에게 더욱 엄한 아버지가 되어 갔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현수가 어긋난 행동을 하거나 훈련을 게을리하면 회초리를 들었다. 얼음판에서는 아버지이기 전에 객관적인 시각의 아마추어 코치이자 감시자였다. 다행히도 현수는 반항하지 않고 내 스타일에 맞춰 왔다.
현수가 고1 때 최연소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다. 뽑힌 지 한 달 만에 2002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000m에 출전한다는 발표가 나가자 빙상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심지어 ‘현수 아버지가 돈을 써서 현수가 뽑혔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런 루머를 전해 듣고 얼마나 웃음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 당시의 난 현수를 위해 로비를 할 만큼 여유도 없었고 있던 집까지 팔아서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수가 쇼트트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후 가장 큰 특징이라면 친구보다 보이지 않는 ‘적’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현수의 성적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들이 늘어났고 말하기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소문들을 양산해내며 묘한 파벌 관계를 형성했다.
<일요신문>을 통해 고백하지만 우린 아직 집이 없다. 김포에 있는 아파트는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이다. 내 사업도 나아졌고 현수도 대회 출전으로 모은 상금이 꽤 되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현수 앞으로 저축해 놓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현수가 대표팀에 발탁되고 또 출전 선수로 뽑히고 메달을 따는 데에는 외적인 영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몇몇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돈을 뿌리면서 현수를 운동시키지 않았다는 걸 큰 소리로 얼마든지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현수가 지금까지 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훈련도 구타도 경쟁도 아니었다. 단 한 가지, 바로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파벌 문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반대 세력에선 계속해서 이상한 소문들로 상대방을 괴롭히고 있다.
아마추어 선수들은 오로지 명예를 위해 피눈물 나는 고통을 참아가며 기록에 도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수나 난 우리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은 결코 참을 수도, 참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없어진다면 현수가 스케이트를 탈 이유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