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스포츠 신문에서 축구담당 기자로 6년을 보내면서 기사를 쓸 때마다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TV와 인터넷을 통해 유럽축구를 접하고 간혹 출장길에 현지에서 축구를 지켜봤지만 축구에 대한 갈증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축구가 단지 거친 몸싸움만이 아닌 사회 문화적인 유럽의 한 단면임을 느껴갈수록 축구의 본고장으로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프리미어리그 개막을 앞두고 지난 8월 16일 드디어 런던 땅을 밟았다. 찜통 더위의 서울을 탈출해서 맞본 초가을 날씨의 런던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상쾌한 영국의 날씨만큼이나 프리시즌에서 펄펄 날았던 설기현(27·레딩 FC)이 잉글랜드에서 쏘는 첫 이야기의 주인공이다(날짜는 모두 현지시간).
설기현은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뒤 처음으로 맞는 미들즈브러전을 하루 앞둔 18일 오후 집에서 쉬고 있었다. 런던 시내에서 설기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2001년부터 담당 기자를 하면서 친해진 설기현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반가워했다.
오전에 가볍게 몸을 풀고 돌아와 내일의 결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한창 얘기를 하는데 전화선을 타고 아들 인웅이가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해 7월 울버햄프턴에 찾아갔을 때 인웅이는 기자들이 떠나려 하자 큰 울음으로 기자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만큼 사람들을 따르는 인웅이다.
인웅이가 태어났다는 기사를 쓴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네 살이란다. 설기현은 “인웅이가 맨날 집에만 있다보니 사람들을 잘 따른다”고 흐뭇해했다. 하긴 울버햄프턴 동료들이 인웅이가 귀엽다며 구단의 마스코트 삼자고 했을 정도니 인웅이의 사교성은 범지구적이다. 커서 아빠를 이어 프리미어리그에 뛴다고 해도 적응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준비된 프리미어리거임에 틀림없다.
▲ 지난해 5월 설기현 입대 당시. 아내 윤미 씨가 카메라폰으로 남편과 아들 인웅 군을 찍어주고 있다. 연합뉴스 | ||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콜이 있었지만 무산된 뒤 사실 마음 고생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시련 뒤에 오는 성공의 달콤함을 잘 알고 있기에 견뎌냈다.
처음으로 유럽 무대를 밟았던 벨기에 앤트워프 시절 많을 때는 한국 선수가 7명이나 됐다. 대한축구협회의 유망주 육성 프로그램에 따라 앤트워프는 한국의 기대주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고 설기현만 축구선수들의 꿈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밟았다. 차근 차근 한 계단씩 올라온 설기현은 아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올라가야 할 계단이 끝이 보이지 않게 많이 남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비록 프리미어리그에 처음으로 입성했고 약체로 분류되는 레딩이지만 설기현은 팀내 최고 이적료의 비싼 선수다. 동료들은 별다른 얘기가 없지만 구단에서 큰 돈을 들인 만큼 잘 해야한다는 마음가짐이 더욱 단단해졌다고 한다.
설기현은 “최고 이적료라고 해도 큰 구단에서 볼 때는 작은 돈이다. 하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부담이면서도 자극제가 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다”란 설기현의 말 속에서 설기현의 최종 목표를 어렴풋하게 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설기현이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와서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영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런던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레딩은 영국 표준말을 쓰는 도시다. 이전 울버햄프턴은 구수한 영국 사투리로 설기현의 귀를 피곤하게 했었다.
변현명 리포터 ddazz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