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고1 안현수가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다. | ||
가정적인 문제로 힘들었을 때 아버지는 아이스링크에 가는 게 두려웠다고 한다. 선수 어머니들이 대부분인 곳에 아버지가 ‘뻘쭘하게’ 서 있는 모습이 처량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용기를 냈다.
현수 엄마가 집을 나간 뒤 현수 뒷바라지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차라리 현수가 스케이트 안 타고 공부한다고 했다면 마음의 부담 없이 사업에 신경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현수는 스케이트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않았고 사업하기에도 바쁜 상황에서 현수를 링크에 데리고 다녀야 했다.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었는데 현수와 날 향해 내리 꽂히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당혹스럽다 못해 괴로웠다. 선수 어머니들은 이미 우리 집 일에 대해 소문으로 다 알고 있었고 남편이 오죽 못 났으면 마누라가 돈 떼먹고 도망가겠냐 하는 눈길로 우리 부자를 지켜봤다. 당시만 해도 현수는 어려서 주위의 시선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로선 링크에서 다른 학부모들을 대하는 게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스케이트를 타는 현수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누굴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다보면 주위의 따가운 눈총이나 욕 등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견디기 수월했던 건 현수의 성적이다. 쇼트트랙을 시작한 이후 항상 월등한 성적을 나타냈고 워낙 스케이트를 잘 타다 보니 우리 부자를 호기심 대상에서 경이로운 존재로 보는 등 시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 잠깐 언급했지만 현수가 최연소의 나이에 쇼트트랙 국가대표에 선발됐던 스토리를 풀어볼까 한다.
▲ 전명규 감독은 올림픽 1000m를 김동성과 어린 안현수에게 맡겼다. | ||
그런데 2002년 1월 춘천에서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곳을직접 방문한 전 교수는 자그마한 체구의 어린 애가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해서 4관왕을 차지하며 종합 우승을 일궈낸 장면을 지켜보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대회가 끝난 후 이틀 만에 ‘콜’이 왔다. 태릉선수촌에 입촌하라는 내용이었다. 현수와 난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대회에서 메달 따는 것보다 대표팀에 선발되는 게 더 힘들다고 들었는데 선발전도 치르지 않고 대표팀에 들어가게 된 부분들이 영 믿기지가 않았다.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면 전 교수에 대한 이미지였다. 평소 대표팀 감독을 맡아 엄격하고 무섭기로 소문 나 있던 터라 어린 현수가 들어가서 그 분 밑에서 잘 적응하고 버틸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현수 위로는 쟁쟁한 선배들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생이 대학생 형들과 어울려 팀을 이룬다는 부분도 현수한테는 감내해야 할 대상이었다.
2002년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촌에서 훈련 중인 현수가 전화를 해왔다. 그러면서 전 교수가 쪽지를 전해줬다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내용은 어린 제자에 대한 격려의 글이었다. ‘지금까지 잘해 왔고 또 잘해 줘서 고맙다는 것과 더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찬 스승의 편지였다. 그 후로 난 전 교수를 다시 봤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같이 차가웠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제자를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따뜻한 배려였다.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직전에 쇼트트랙 대표팀은 콜로라도에서 전지훈련을 가졌다. 이때 전 교수는 현수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대선배 김동성과 붙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다른 2명의 선수와 비교해도 현수의 실력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000미터에 나갈 선수를 결정하는 순간 전 교수는 4명의 선수들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꺼냈단다.
“너희들도 현수 타는 거 보고 생각한 게 있을 것이다. 어때? 난 현수가 (김)동성이와 함께 1000미터를 뛰었으면 한다. 내 생각에 불만 있는 사람은 얘기해봐.”
2001~2002월드컵 랭킹 2위인 이승재나 4위 민룡은 전 감독의 예상 밖의 발언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