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25일 만난 전 세계챔피언 장정구 씨. 그는 아무 준비 없이 은퇴한 후 무수한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오른쪽 사진은 장 씨의 선수 시절 경기 장면(연합뉴스). | ||
추석 특집을 맞아 <일요신문>에서는 오래 전에 은퇴한 전 세계 복싱 챔피언들의 근황을 집중 취재했다. 유명우, 홍수환 씨 등은 매스컴을 통해 종종 살고 있는 모습이 소개되곤 했지만 대부분의 챔피언들은 자신들의 현재 삶이 공개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바람에 소재를 파악하기조차 어려웠다. 작고한 김기수 씨부터 최근에 타이틀을 잃은 지인진까지 모두 43명의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한국의 프로복싱. 그러나 그들 중 은퇴 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장정구-‘짱구’가 ‘당한’ 이야기
전 복싱 챔피언들의 연락처를 알아낸 후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한 사람이 장정구 씨(43·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15차 방어 성공, 42전 38승(17KO) 4패)였다. ‘짱구’라는 유명한 별명을 갖고 있었던 그는 기자의 인터뷰 부탁에 약간은 망설이다가 승낙을 했다. 빳빳하게 다린 흰색 와이셔츠에다 커프스 버튼을 하고 세련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장 씨는 경제적인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중년의 남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그의 말끔한 외모 이면에는 사연 많은 아픔과 고통이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988년 15차 방어전을 성공시킨 뒤 복잡한 가정 문제로 운동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던 장 씨는 결국 돈 때문에 다시 링 위에 올라간다. 그러나 두 차례 판정으로 물러섰다가 마지막엔 복싱 인생 최초로 KO패를 당하며 완전히 복싱 인생을 접게 되었다. 장 씨는 “한 번 스톱했다가 다시 달려가려다보니 부담이 많이 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결혼한 여자에게 있는 돈을 모두 날리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면서도 복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글러브를 다시 끼었다가 실력 차이만을 절감케 됐던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인생을 새출발했다고 한다.
“권투 선수로선 해볼 거 다 해봤고 누려볼 만큼 누려봤다. 그러나 인생은, 은퇴 후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 준비 없이 사회로 뛰어 들었고 준비하지 못한 만큼 ‘당하고’만 살았다. 세계 챔피언 장정구가 아닌 은퇴한 장정구는 별 인기가 없었다. 그걸 깨닫는 데 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 9월 28일 ‘홍수환 복서로빅’을 연 홍수환 씨(오른쪽 두 번째)가 아내 옥희 씨, 가수 장미화 씨 등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선배들, 친구들, 처갓집 등등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다. 돈 있을 때 여기저기 많이 퍼준 것이 그래도 도움이 되더라. 그때 도움 받았던 분들이 잊지 않고 갚아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도움 받은 것보다 배신당한 게 70%는 더 많다. 그것도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등에 ‘칼’을 꽂았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돈 떼인 것보다 더 힘들었다.”
장 씨는 운동하면서 몸을 혹사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은퇴 후에 힘든 일은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사방에서 조여 올 때는 ‘인생 뭐 있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거지’라고 자위하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었단다.
“명색이 세계 챔피언인 사람이 굽신거리며 살 순 없지 않은가. 챔피언은 돈보다 명예다. 그것도 세계 챔피언은 더욱 그러하다. 난 돈이 많은 것보다 지난 2000년 WBC 기구로부터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등과 함께 ‘20세기를 빛낸 복서’로 선정된 게 훨씬 더 기쁘다.”
그러나 자신이야 ‘선택 사항’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가족들은 낙관적인 가장의 생활방식 때문에 힘든 순간 순간들을 겪어내야 했다.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찔러 아줌마 퍼머를 하고 나타난 것이 ‘짱구 헤어스타일’의 시초였다는 얘기도 처음 들었다. 지금도 남자 배우들이 파격 변신을 시도하기 위해 퍼머 머리를 하고 나타날 때마다 ‘짱구 머리’ 운운할 때가 많아 그 유명한 ‘짱구 머리’는 장정구란 세계 챔프를 추억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 거리’가 된다.
“지금은 뭐 하고 지내세요?”라고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었는데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신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하얀색 명함을 꺼내며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 명함에는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소개돼 있었다.
김태식-‘돌주먹’과 ‘불타는 껍데기’
강남의 역삼동에서 장정구 씨를 만난 다음 찾아간 곳은 면목동 동부시장의 곱창 골목이었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골목길이 한산했다. 간판을 확인 후 들어간 곳은 ‘불타는 껍데기’ 집. 곱창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길에 있는 껍데기 집은 달라 보였다. 그러나 그 집이 더 달라 보인 이유는 가게 안에 걸려 있는 역대 복싱 챔피언들의 사진 때문이다. 그들 사진 사이로 이름 석 자가 눈에 띈다. 바로 김태식 씨(49·WBA 플라이급 2차 방어, 20전 17승 3패(13KO))였다.
플라이급에선 보기 힘든 ‘파이터 머신’ ‘돌주먹’으로 유명했던 김 씨는 은퇴 후의 인생도 타협 모르고 저돌적으로 달려온 복싱 인생과 비슷하다. 은퇴 전 마지막 경기에서 의식을 잃는 바람에 5시간 동안 뇌수술을 받고 깨어났지만 머리 수술을 받았다는 선입견 때문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 씨는 가게를 방문하기 전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정중히 거절했다. 할 말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기자가 아닌 손님으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자 그건 막지 않겠다고 해서 무작정 가게를 찾아간 것이다.
▲ 고깃집을 운영하는 전 세계챔피언 김태식 씨는 요즘 여자선수를 키우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기자를 본 김 씨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정겹게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냈다. 물론 인터뷰는 아니었다.
김 씨는 복싱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를 높였다. 직접 복싱하는 제스처를 취해보며 ‘요즘 애들’ 하는 권투는 진짜 권투가 아니라고 흥분했다.
“때리려면 제대로 때려야지 따귀 때리는 듯하는 건 권투가 아니다. 내가 권투할 때는 거의 미쳤었다. 암기력이 없어 초등학교도 재수를 했었는데 WBA 12체급을 다 외우고 챔피언들의 전적을 달달 읊고 다녔으니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미쳐서 달려든 복싱은 김 씨에게 짧은 행복, 긴 불행을 안겨주었다. 프로모터, 매니저의 ‘이상한 계산법’에 의해 계약금은 물론 파이트 머니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 매맞으며 번 돈이 다른 사람들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걸 안 이후론 권투를 그만두겠다고 글러브를 불태우는 등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다.
“은퇴 후의 삶은 악몽이었다. 하는 것마다 다 까먹었다. 다행이라면 술을 안 마신다는 것이었다. 은퇴 전에 머리 수술을 받아서 그런지 어떤 사람들은 김태식이 죽은 걸로 알고 있더라. 또 다른 사람은 머리 수술 때문에 ‘또라이’가 된 거 아니냐고 의심스런 눈길을 보냈다. 내가 설 땅이 없었다. 결국 6년 전에 이곳 곱창골목으로 들어왔는데 장사가 잘 되는 편이 아니다.”
김 씨의 전 재산은 어머니가 그 험난한 풍파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집 한 채뿐이다.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그 집마저 없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김 씨는 요즘 비밀리에 선수를 키우고 있다. 탁구 선수 출신의 여자 복서다. 스타일도 자신과 아주 흡사하다. 여자 선수지만 남자 못지 않은 파워에 들이대는 성격이라고 자랑한다.
“도망가는 권투를 제일 싫어한다. 무조건 두드려 맞고 두들겨 패야 한다. 그 선수가 그런 타입이다. 권투가 너무 싫어서 그만둔 건데 어느 순간 후배를 키우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김태식이 ‘또라이’도 아니고 ‘죽은 사람’도 아니라는 걸 후배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
김 씨는 복싱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제대로 된 권투, 신나는 권투,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권투를 보여준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복싱에 대해, 사람에 대해 한이 많았던 김 씨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2시간 넘게 ‘불타는 껍데기’ 집에 머물렀지만 기자가 나올 때까지 역시 손님은 없었다. 그러나 고기맛은 정말 끝내줬다.
(다음 호에 박종팔, 김상현, 박찬희 씨의 은퇴 후 삶이 소개됩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