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여덟, 적지 않은 나이지만 구대성의 투구는 날카롭고 매섭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
구대성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특유의 배배 꼰 투구폼과 여유 있는 미소로 마운드를 지배하고 있다. 올 초 구대성이 뉴욕 메츠에서 방출당한 뒤 한국프로야구로 컴백했을 때 그가 이처럼 성공할 것으로 예측한 전문가는 드물었다. 한국 나이 서른여덟에 전성기를 지난 구위 때문에 자칫 망신을 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구대성은 정규시즌에서 3승 37세이브, 방어율 1.82로 화려하게 부활을 알렸다. 이어 최근 KIA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도 두 경기에서 1승1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직구 평균 시속이 140㎞에도 미치지 못하는 구대성의 부활 원동력은 무엇일까.
▶▶공옥진 여사의 수제자?
구대성은 ‘병신춤’의 대가인 공옥진 여사와 많이 비교되곤 한다. 특유의 투구폼 때문이다. 보통 왼손 투수는 셋포지션에서 시선이 1루쪽을 향하는 게 정상이다. 1루를 바라보다가 3루에 주자가 있으면 어깨 너머로 슬쩍 한번 흘겨보고는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진다.
그런데 구대성은 셋포지션에서 시선이 거의 2루쪽을 향해 있다. 그만큼 몸을 많이 틀어놓은 상황에서 투구가 시작된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공을 던지는 왼쪽 팔이 감춰진 상황에서 나온다. 타자 입장에선 상당히 헷갈리게 된다. 이게 바로 구대성이 구속이 빠르지 않음에도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는 이유다. 몸을 극도로 꽈서 던지기 때문에 이 같은 투구폼은 공옥진 여사의 춤사위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수제자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KIA 이종범을 비롯한 각 구단 타자들은 “대성이 형이 일본 가기 전보다 투구폼이 더 희한해진 것 같다”고 평가한다.
▶▶대전천 움막집의 추억
구대성은 대전 뚝방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겪었다. 대전고 졸업반 때 고교 투수 랭킹 최상위에 오른 구대성이었지만 대전 천변 다리 밑의 움막집에 살았다고 한다. 88년 겨울 당시 빙그레 쪽에서 졸업반 구대성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인 3000만 원을 들고 찾아갔지만 움막집 청년 구대성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야구를 하는 것은 훗날에도 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구대성은 한양대 진학을 택했다. 가난했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선 본래 목표를 버리지 않겠다는 집념을 보여준 것이다.
구대성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대전 신흥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에 입문한 구대성은 학교에서 ‘딱지왕’으로 불렸다. 그 시절 어린이들의 가장 큰 유희였던 ‘딱지 놀이’에서 구대성을 당할 자가 없었다. 심지어 구대성이 강한 어깨와 손목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딱지 덕분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뭘 하든 열심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다.
매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5년 만에 돌아온 한국 리그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최고참급 투수지만 항상 몸 관리에 신경을 쓰며 노력한다. 두주불사 스타일이라 술자리도 잦은 스타일이지만 대신 꼬박꼬박 훈련량을 채우는 게 롱런의 원동력이다.
지난 6월 구대성은 경기 중 큰 사고를 당했다. 문학구장에서 SK와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불펜에 있다가 부러진 배트가 날아와 구대성의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진 구대성은 곧바로 응급 치료요원으로부터 지혈을 받았지만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에서 인천 길병원으로 후송됐다.
소속팀 한화는 물론 상대방인 SK마저 소스라치게 놀란 사건이었다. 지난 2000년 경기 중 쓰러져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병상에 있는 롯데 임수혁의 사건 이후 이 같은 사고가 나면 구단들이 잔뜩 긴장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상처 부위를 꿰매고 퇴원한 구대성이 던진 한 마디에 한화 직원들이 배를 움켜잡아야 했다. 구대성은 당시 “등에 담이 결려서 고생했는데 피를 쫙 뺐더니 아픈 게 사라졌다”며 껄껄 웃었다. 본인보다 더 울상인 구단 직원들 얼굴을 보면서 구대성은 조크로 모두를 안심시킨 셈이다.
이처럼 예측하기 힘든 성격 때문에 구대성은 기인 소리를 듣기도 한다. 지난 2001년 일본 오릭스에 진출하기 전까지 구대성은 대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미 국내 프로야구에서 에이스급으로 성공해 돈도 많이 벌어놓은 상태였지만 구대성은 13평 아파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면 불우이웃을 위해 수천만 원을 쾌척하는 선행에는 주저 없었다.
▶▶아들 위해 메이저리그로
지난 2002년 겨울 대전 유성의 한 호텔에서 한화 선수들이 납회식을 하고 있었다. 이날 오릭스 소속인 구대성이 나타나 동료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당시 구대성은 프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강인한 인상과 맞물려 굉장히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야구 선수들 가운데 ‘영웅본색’의 주윤발 스타일 패션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겉모습은 터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녀들을 끔찍이 아끼는 자상한 아빠다. 1남1녀를 둔 구대성은 자녀 교육에 열정을 갖고 있다. 2004년 말 구대성이 일본 오릭스를 떠나 헐값에 뉴욕 메츠행을 택하자 주변에선 “왜 그런 선택을 했나”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일본에 남거나 혹은 국내로 컴백하면 훨씬 큰 돈을 받을 수 있는데 아무런 보장을 받지 못하는 미국을 택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구대성이 미국을 택한 건 전적으로 자녀 교육 때문이었다고 한다. 본인의 야구 인생보다는 자녀 교육에 더 큰 무게를 뒀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도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뉴욕 메츠에서의 1년은 야구 선수로서는 실패작이었다. 왼손 셋업맨으로 활약하긴 했지만 낯선 환경에서 시즌 후반에는 벤치 신뢰를 얻지 못해 제대로 경기에 출전하지도 못 했다. 하지만 야구선수 이전에 아빠로서의 목표는 이룬 셈이다. 목표를 정하면 그것을 위해 다른 조건을 돌아보지 않는 인물. 그게 바로 구대성이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