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기현 선수와 어머니 김영자 씨. 김 씨는 ‘다치지 말라’는 소망을 밝혔다. | ||
둘째 아들(설기현) 사진이 대부분이라 다른 아들들이 서운해 할 것 같지만 설기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가족애는 그런 시각을 부정한다. 형과 동생들이 모두 설기현의 선전을 기원하며 매일같이 영국을 향해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어머니 김 씨는 ‘별들의 탄생 신화’ 마지막회에 이르러 둘째 아들에게 처음으로 편지란 걸 써봤다. 이국 땅에서 희로애락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기현아! 엄마다.
신기하지? 엄마가 너에게 편지를 다 쓰고 말이야. 처음이라 그런지 참으로 쑥스럽다. 전화 통화를 자주 하면서도 이렇게 편지 쓰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편지를 쓰려니까 왜 자꾸 옛날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떠올려봤자 그리 기분 좋아질 리가 없는 옛날 우리 살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신문에 연재라는 걸 하면서 참 많이 반성했다. 입으로 꺼내 놓고 보니까 내가 널 뒷바라지해준 게 너무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다른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발로 뛰어 다니고 모든 훈련과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마음 속 응원과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엄마는 정말로 아무 한 것 없이 빈 손으로 널 키운 것 같아 자꾸 숨고만 싶다.
옛날 탄광촌에서 살던 세월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먹을 게 없어 영양 부족 상태로 지냈던 아픔들, 그 속에서 놓지 않고 끌고 갔던 축구 생활, 그리고 선수로 성장하기까지 난 그저 지켜보는 걸로만 내 역할을 다 했던 것 같다.
기현아,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봤다.
엄마가 다른 엄마처럼, 아니 설기현의 엄마가 지금의 김영자가 아니라 다른 엄마들처럼 좀 더 많이 배우고 똑똑했더라면 기현이가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걸 갖춘 축구 선수가 됐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너무나 없는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업보’로 알고 살아온 널 생각하면 가슴을 쥐어 뜯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강릉에서 포장마차했을 때 생각나니? 내가 일을 마치고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면 넌 날 찾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녔었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내가 도망갈까봐, 아들 넷 키우기가 너무 버거워서 자식 놓고 도망갔을까봐 어린 마음에 걱정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지금 고백하건대,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돈 한푼 없이 돈에 쫓겨 사는 삶 자체가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들었고 버거울 때는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삼촌 등 친척 한 명 없는 상황에서 나마저 너희들을 외면해 버리면 4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고아원에서 지냈을 거란 생각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에미가 어떻게 자식을 버리겠니? 난 죽었다 깨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을 제대로 키우고 싶었고 다행히 네가 축구 선수로 성장하면서 나 또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기현아, 고등학교 때 축구대회가 열릴 때마다 엄마는 일을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축구장인데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사판에서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눈물나게 싫고 미웠다. 엄마가 가서 ‘기현아! 힘내라’하면 정말 열심히 뛸 터인데 그렇게 못하는 내 심정은 참 많이 괴로웠다.
그래도 어긋남 없이 정해진 길을 잘 따라 걸어준 우리 기현이 덕분에 별로 해준 것 없이 뒷바라지 운운하며 매스컴에 오르내린 것 같다.
기현아, 지난번 영국 갔을 때 말이야. 레딩 FC 홈경기장에 가보니까 정말 대단하더라. 그 사람들의 축구 열기도 놀라웠지만 이적해온 선수의 이름을 ‘세올, 세올’하고 부르며 응원과 함성을 보내는 그들 속에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내 아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내 아들이 정말 대단해서 울고 또 울었다.
우리 욕심내지 말자. 어렵게 어렵게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갔듯이 앞으로도 ‘고속 주행’ 바라지 말고 천천히 목표에 도달해 나가자. 그리고 제발 다치지 마라. 난 네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하는 것보단 부상당하지 않고 오랫동안 축구 선수로 남아주길 바란다. 그건 기현이의 엄마이자 기현이의 영원한 팬인 김영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