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후 현진이는 줄곧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인천의 5개 중학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밀려들어왔다. 그들 중 한 중학교 감독, 코치와는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그들은 나와 술 한잔 하자면서 ‘은밀한 유혹’을 계속했지만 평소 친분으로 술은 마실 수 있어도 아들의 진로 문제는 나와 관계없는 일임을 강조했다.
난 현진이에게 스스로 진로를 선택하게 했다. 어차피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부모보다는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진이는 고민 끝에 동산중학교를 선택했다. 다행히도 내가 바랐던 학교와 비슷했다.
현진이가 야구를 시작한 이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한 말이 있다. 바로 홈런을 맞더라도 포볼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투수가 정면 대결을 벌이지 못하고 도망가는 게임을 한다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다른 건 욕을 안 해도 1게임당 포볼을 5개 이상 주면 글러브 벗고 공부하라며 야단을 쳤다.
투수가 피해가는 승부를 하다가 요행수를 바랄까 걱정이었다. 마운드에 올라가선 ‘싸움닭’이 돼야 다른 선수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투수들도 있으니까 혼자만 야구할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인 승부로 팀의 리더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간혹 경기를 보러 가지 못하면 현진이가 전화를 걸어 경기 결과에 대해 말하다 이런 멘트를 꼭 달았다. “아빠, 오늘 게임은 졌는데 나 포볼 한 개도 안 줬어요!” 그런 얘길 들을 땐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했다.
담력과 배짱을 키우기 위해 ‘바이킹’과 ‘공동묘지’를 이용했다. 인천 월미도에 가면 바이킹 타는 데가 있는데 현진이와 자주 그곳에 놀러갔다. 하루는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꾹 참고 현진이와 함께 올라탔다가 기절 직전에 내린 적도 있었다.
부평에 있는 공동묘지도 현진이와 자주 들렀던 곳이다. 새벽 1시경 현진이를 태우고 공동묘지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현진이를 내려놓고 난 밑에서 기다렸다. 뛰어오든 굴러오든 알아서 내려오라는 말만 남기고 냉정하게 뒤돌아 오는데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현진이가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닌 데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속도가 더뎠다고 한다. 주위가 온통 어두컴컴한 데다 공동묘지의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현진이가 밑에 내려왔을 때는 옷이 흠뻑 젖어 있을 정도였다.
내 자식이지만 기특한 것은 단 한 번도 ‘싫다’란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바이킹을 타라고 해도, 공동묘지에 가자고 해도, 또 홈런을 맞더라도 도망가지 않는 피칭을 하라고 성화를 부려도 현진이는 무조건 ‘네’ 하면서 내 뜻을 따랐다.
한번은 현진이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빠는 야구 선수의 심리를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당시 대답하지 못했던 말을 이곳에 적어본다. “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야구경기 보다가 해설위원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은 거지. 비디오 교본 있잖아? 그것도 참고했어. 아빠가 대단한 야구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미안하다. 하하.”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