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이 된 뒤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올림픽 종목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 ||
▶‘삼성이 했는데’ 오히려 퇴보?
삼성은 97년 대한육상경기연맹의 회장사를 맡았다. 96년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이 되면서 그룹 차원의 올림픽 종목 육성이 시작됐고 ‘기초 중의 기초’로 불리는 한국 육상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삼성그룹에서 거물이었던 이대원 삼성중공업 회장이 육상연맹 회장을 맡았고, 2005년 그룹 내 스포츠 전문가인 신필렬 씨가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삼성의 간판인 삼성전자가 회장사를 맡고 있다. 또 2000년에는 당시 소속팀이 없어 ‘나 홀로 훈련’을 하던 이봉주 등 전 코오롱 선수들을 주축으로 삼성전자육상단을 창단해 짧은 시간 내에 세계적인 육상 클럽이 됐다. 일단 외관상으로는 그럴 듯하다. IOC 위원을 배출한 삼성이 꽤 신경을 써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0년째를 맞이한 현재, 들여다볼수록 ‘삼성의 한국 육상’은 치부를 보여주고 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경기력이 ‘삼성 집권’ 이전보다 훨씬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2006년 12월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은 극적으로 최악의 망신을 면했다. 마지막 날에 남자 창던지기의 박재명이 우승하는 바람에 ‘노골드’의 수모를 당하지 않았던 것. 그래도 금 1, 은 1, 동 3개. 은 1개, 동 1개였던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는 비켜가지 못했다. 확실하게 삼성이 회장사를 맡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98년과 2002년에는 3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메달 주인공들은 모두 삼성시대 이전에 발굴된 선수였다. 즉, 박재명을 제외하면 삼성이 키워낸 아시안게임 골드메달리스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실업팀 지도자는 “삼성은 세계적인 브랜드인데 그동안 한국 육상을 발전시켜 놓은 것이 뭐가 있나? 다들 하는 인터넷 전산망을 확충한 것을 제외하면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육상연맹 홈페이지에서 하고 있는 설문조사. 우리나라 육상이 뒤처지게 된 원인으로 ‘육상인대우 및 처우개선’이 첫 번째로 꼽혔다. | ||
경기력뿐 아니라 육상인프라나 경기인 간의 화합 등에서도 삼성은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삼성이 돈이 없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1년 예산은 45억 원 안팎이다. 45개 세부 종목을 감안하면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다. 이중 삼성그룹이 지원하는 몫은 12억 원 선. 예상외로 미미한 액수다. 국내 프로 스포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삼성은 2005년까지 국내 3대 인기 프로 스포츠의 타이틀 스폰서를 맡았다. 종목당 연간 30억 원에서 100억 원을 투자했다. “삼성이 없으면 국내 프로 스포츠가 망할 판”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 삼성 라이온즈(야구), 수원 삼성(축구), 서울 삼성(농구) 등 삼성그룹 직계 프로팀에는 연간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육상만 봐도 그렇다. 남녀 마라톤과 경보 선수를 육성하고 있는 삼성전자육상단의 연간 예산이 36억 원선이다. 물론 삼성이 자신의 육상팀 발전에 투자하는 것도 육상 발전의 일환이다. 하지만 육상 전체의 발전에 쓰는 돈보다 삼성 자체 팀에 쓰는 돈이 더 많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학팀 지도자는 “연맹에 어떤 일을 건의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예산이 없다거나 혹은 다른 세부 종목과의 형평성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결국 돈이 없다는 얘기다. 예컨대 육상연맹이 몇 안 되는 자랑으로 내놓고 있는 포상금만 해도 그렇다.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한국 기록이나 세계 기록에 엄청난 액수를 공표하는 것은 언론플레이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그 돈을 쓸 생각이 있으면 부별 최고 기록, 시즌 최고 기록 등 많은 선수들에게 당근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내 육상 인프라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한국처럼 겨울철이 추운 나라에서는 필수인 실내육상경기장이 없다.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면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겠지만 아직 계획조차 없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트랙 및 필드종목의 기록을 실외와 실내로 나눌 정도로 실내육상은 이미 육상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한국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지훈련도 중국 미국 등지에 싼 값에 장기 임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알아만 보다 끝내고 말았다.
▲ 한국 마라톤의 간판스타 이봉주의 뒤를 이을 마땅한 기대주조차 없는 것이 현 한국 육상의 현실이다. | ||
한 실업팀의 관계자는 “참 신기한 일이다. 삼성에 물어보면 돈도 있고, (육상 발전을 위해) 투자할 의사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투자는 집행되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육상연맹의 삼성 측 관계자는 “육상 발전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돈을 쓸 의사가 있다. 종목 간의 형평성 등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며 세계 스포츠계의 ‘큰손’으로 우뚝 선 삼성에게 돈이나 의욕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이 문제인가. 연맹 내부와 깊숙이 관련돼 있는 한 육상인의 충고가 어느 정도 답을 마련해주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문제다. 육상인들은 97년 삼성이 육상연맹을 맡을 때 엄청난 기대를 했다. 삼성도 최고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육상인들 내부에서 고질적인 분란이 일어났다. 세부 종목 간에 서로 지원을 받아야 한다며 당위론을 들고 나왔다. 육상인들이 삼성이라는 엄청난 ‘떡’을 놓고 서로 싸운 셈이다. 물밑으로 삼성과 친해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삼성 측이 아예 돈줄을 잘라 버린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승리한 일부 인사들이 자신의 영달에 관심이 많을 뿐 육상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일선 육상계와 삼성 사이의 의사 소통을 확실하게 수행할 통로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삼성이 한국 육상의 총수로 내려 보낸 이대원 전 회장과 신필렬 현 회장은 취임사로 똑같이 말했다. 바로 ‘세계 수준의 경기력 향상’과 ‘육상인의 단합’이다. 그런데 경기력은 퇴보했고, 육상인들의 반목과 갈등도 더 심해졌다. 신필렬 회장이 내세운 ‘(육상의)한국 스포츠 1번지론’은 아예 공허한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을 계속 맡는 한 삼성이 한국 육상에서 손을 떼지는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결국 제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빨리 바로 잡지 않으면 ‘돈 쓰고 욕 먹는’ 나쁜 관행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유병철 스포츠 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