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홍만의 집에 걸려 있는 씨름선수로 활동할 당시의 사진. 아버지 최한명 씨는 그때 가족의 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 ||
K-1 무대에 우뚝 선 아들은 이전보다 더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소문으로 나돈 수십억 원대의 재계약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이 유명해질수록 아버지는 조금씩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천하장사가 됐을 때는 우승컵과 대형 상품들을 품에 안고 금의환향하며 부모의 기를 팍팍 살려주던 ‘거인’이 종목을 바꾼 후로는 고향 방문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홍만이가 씨름을 할 때는 여러 가지 잔재미가 있었다. 천하장사에 올랐을 때는 에어컨을, 백두장사가 됐을 때는 평면TV를 타오는 등 집에 살림살이가 늘어나면서 아내의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휴가가 주어졌다. 그럴 때마다 제주도 집에 내려와 학교 스승과 지인들을 찾아뵈며 인사를 드리고 가족들과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K-1 진출 후로는 홍만이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새로 접하는 종목이고 훈련 스케줄이 빡빡하다보니 좀처럼 짬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켠에선 왠지 모를 섭섭함이 피어오른 것도 사실이다. 아들의 유명세도 좋지만 이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가족들의 정과 사랑을 느끼는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많이 든 모양이다.
홍만이가 고등부에서 이름을 날리자 졸업하기 전부터 실업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물밀듯이 했다. 당시 강원도의 태백건설에서 3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홍만이를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고민과 갈등이 많았던 순간들이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3억 원이란 돈은 엄청난 유혹과 미끼였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동아대 송미현 감독이 홍만이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의 제자로 만들고 싶다며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부산에서 운동을 한 터라 동아대 진학이 자연스러웠지만 실업팀의 제의를 쉽게 뿌리치기엔 돈 액수가 컸다.
그러나 홍만이와 많은 대화 끝에 돈은 나중에 벌자고 합의를 봤다. 일단 대학이라는 간판을 무시할 수 없었고 운동 이후의 모습을 고려했을 때 대학에 들어가는 게 우선이었다.
정말 순간의 선택이었다. 홍만이가 대학 1학년 때 벌어진 설날장사씨름대회에서 당시 최고의 씨름 선수였던 ‘원조 골리앗’ 김영현을 이길 것이라고 꿈엔들 생각해 봤을까. 그때부터 홍만이는 씨름계의 ‘유망주’가 아니라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면서 스타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제주를 빛낸 인물로 선정돼 아들 덕분에 매스컴에 내 사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홍만이가 더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춤 때문이었다. 선배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테크노 댄스로 발전했고 어느새 그 모양새를 본떠 ‘테크노 골리앗’이란 별명이 붙었다. 솔직히 거대한 내 아들이 모래판에서 춤을 출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홍만이가 그렇게 춤을 잘 추는지도 전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산에서 합숙하며 스트레스 쌓일 때마다 찾아간 곳이 나이트클럽이었다고 한다. 덩치가 커서 나이트클럽에 가면 주위에 사람이 모이지 않았단다. 홍만이의 팔에 살짝만 닿아도 넘어지거나 엎어지는 바람에 홍만이가 무대에 오르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했다는 것. 그런 재미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들이 많이 모여서인지 하여튼 홍만이는 춤을 추러 나이트클럽을 다녔고 그런 남다른 끼가 모래판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홍만이의 대회 출전이 잦아지면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우리 부부도 덩달아 바빠졌다. 그러나 가게 문을 닫기가 어려웠다. 하루라도 문을 닫으면 단골들이 빠져나가기 마련이라 둘 중 한 사람은 가게에 남아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주로 아내가 남고 내가 경기장을 찾아 다녔는데 아내 혼자서 종업원들과 일을 할 때는 내가 하는 일까지 아내가 맡기 때문에 힘이 두 배 이상으로 들었다. 다리가 퉁퉁 붓고 손이 불어 터도 아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이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홍만이가 씨름판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자 고생도 고생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배가 고파도 고픈지를 모르는 기쁨, 행복함들…. 그때가 가장 신나게 일하고, 가장 신나게 아들 녀석을 응원하러 다닌 시절이었다.
정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