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무렵. 경기도 용인의 KCC 숙소는 창단 후 최다연패(10연패, 이후 KCC는 지난 2월 22일 홈경기에서 서울 SK를 이겨 연패 사슬을 끊었다)의 분위기만큼이나 적막했다. 허재 감독은 지인을 만나러 잠깐 외출했고 김광 코치를 중심으로 선수들은 야간자율훈련 중이었다.
“감독님은 이발하러 나가신 걸로 아는데 금방 들어오실 겁니다. 술이요? 원래 좋아하시잖아요. 예전엔 많이 자제했는데 요즘 워낙 성적이 안 좋다 보니 술을 입에 대는 횟수가 늘지 않았겠어요? 모르겠어요. 가볍게 술 한잔 하고 들어오실지도 모르겠네요.”
김광 코치는 허재 감독이 최근 마음고생이 무척 심하다고 설명했다. 올 시즌 주요 선수들의 부상과 계속되는 용병 선발 실패 등 악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농구명가’ KCC의 수모는 결국 ‘농구대통령’으로 불리던 허 감독에 대한 책임론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KCC는 허 감독이 부임할 당시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강팀이었다. 허 감독은 첫해인 2005~2006시즌 6강 플레이오프(정규리그 5위)에 진출하며 간신히 망신을 면했다. 하지만 2006~2007시즌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조성원이 은퇴했고 ‘똑똑한 용병’ 철수(찰스 민렌드)가 전 KCC 사령탑인 신선우 감독을 따라 LG로 이적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됐다. 용병 선발 실패와 조직력 약화, 전술 부재 등이 겹치며 허재 감독은 자신의 농구 인생 30년 만에 첫 꼴찌의 수모를 당하며 최악의 해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라는 게 원래 성적이 나쁘면 말이 많게 마련이다. ‘농구 대통령’으로 치켜세우던 언론도, 또 팬과 농구인들도 허 감독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눈치다. 선수 장악력, 전술 구사 능력, 용병 선발 등 대부분의 문제가 감독에게 있는 것 아니냐는 여론도 흘러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 어려움을 몰랐던 허 감독이 총체적 난국을 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론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즉 올해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허 감독이 명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적다고 폄하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허재) 감독님이 변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고 또 노력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어디 사람이 한 번에 확 바뀝니까? 이번 수모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선수의 말처럼 KCC 내부적으로도 ‘스타 감독’인 허재에게 많은 것이 요구되고 있었다. 허 감독은 저녁 10시가 되도록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허 감독에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워낙 그룹 오너 일가와 친분이 두텁다 보니 한 번의 실패가 곧장 낙마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열려 있다는 의미다. KCC 최고위층이 허재 감독을 영입할 때 경영회의 자리에서 허 감독을 소개하며 “(허재 감독은) 우리 집안의 아들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5년은 보장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허 감독과는 달리 선수 시절 뛰어난 기량 못지않게 지도자가 돼서도 능력을 발휘하는 감독이 있다. 바로 삼성 라이온즈의 선동열 감독이다. 선 감독은 스타플레이어는 많지만 모래알이었던 삼성에서 확실한 구심점이 됐다.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차범근 감독은 허재 감독과 선동열 감독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TV 해설자로는 모르겠지만 지도자로는 아직까지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차 감독은 지도자로서는 부침이 심했다. 차 감독은 삼성 이전까지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아니 명성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든든한 지원과 최고의 선수를 공급하는 삼성의 로고를 붙인 후 2004년 우승과 2006년 준우승 등 그런대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선동열 감독은 김응용이라는 큰 스승과 일본 시절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이 지도자 선동열을 더 강하게 만든 것이다. 차범근 감독도 98월드컵 중도하차 등 명성에 걸맞지 않는 ‘지도자의 실패’가 계속됐다. 어떤 경험이든 소화하기 나름이지만 한때의 어려움이 두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스타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전까지 허재 감독에게는 ‘고난’이 없었다. 오히려 지도자 데뷔 자체가 너무 화려했다. 허 감독의 선배인 한 농구인은 KCC의 부진에 대해 “스타플레이어라는 배경은 지도자에게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언제 깨닫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의 슈터였던 아무개 씨처럼 너무 늦으면 그만큼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한편 이런 분위기에 대해 당사자인 허재 감독은 “성적이 나쁜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한 번도 꼴찌는 해본 적이 없는데 정말 답답하다. 인생의 쓴 약으로 삼겠다”라며 말을 아꼈다.
유병철 객원기자 einer6623@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