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 차보람(왼쪽),동생 차유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렸을 때부터 백팔십도 달랐어요. 가치관, 성격 모두 차이가 있었죠. 제가 이성적인 편이라면 언니는 감정적이었어요. 전 혼자서 잘 노는 편이고 언니는 주위에 꼭 사람이 있어야 했어요. 전 친구가 없었지만 언니는 친구가 많았죠. 당시 골목대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동생 차유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언니 차보람이 “감정적이라는 말보다 감성적이 낫지 않냐”라고 자신에 대한 표현을 정정해 달라고 하자 차유람이 곧바로 말을 바꾼다. 언뜻 보기엔 많이 닮은 외모였지만 말이나 행동에서 두 자매의 차이점은 명확해 보였다.
부모님이 모두 생업에 종사하느라 집을 비웠던 어린 시절. 차보람은 동생한테 엄마 노릇을 했다고 한다.
“책임감이 강했어요. 엄마 대신 유람이를 보호해주고 돌봐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굉장히 무섭고 엄격하게 대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두 살 차이밖에 안 났는데 동생을 거의 ‘잡듯이’ 대했으니까 좀 심하긴 심했죠.”
사실이었나보다. 차유람은 “언니가 엄마보다 더 무서웠다”고 덧붙인다. 가끔 매를 들었던 언니에게 반항하려고 해도 후폭풍이 무서워 감히 대들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차보람이 “산딸기 따러 산에 많이 갔었는데 뱀 나온다는 소리에 유람이를 데려가지 않았다”면서 “동생이 위험할까봐 내가 산딸기를 따서 동생에게 갖다 줬다”고 설명한다.
차보람이 테니스를 시작한 계기는 순전 과체중 때문이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몸이 굴러다닐 정도’였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차에 타라고 하더니 테니스 코트 앞에 내려줬다는 것. 테니스를 배우며 살을 빼라는 의미였다.
“언니가 테니스를 배우니까 부모님의 관심이 온통 언니한테 쏠리는 거예요. 너무 질투가 났어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나도 테니스 배울래요’하고 말을 꺼냈는데 아버지가 만류하지 않으시고 테니스를 치게 하시는 거예요. 언니를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언니의 실력이 저보다 월등했거든요.”
여자도 국제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아버지 차성익 씨(53)의 남다른 가치관에 의해 두 딸은 전남 완도에서 테니스를 시작했다가 여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당구로 전업했다. 아버지 차 씨는 당시 ‘미친 사람’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두 딸이 당구 선수로 성장하는 데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테니스를 위해 전학만 15번 시켰어요. 좋은 지도자가 있는 학교를 찾아다녔던 거죠. 테니스도 그 정도였는데 당구는 오죽했겠어요?”
차유람은 부모님의 희생과 앞선 마인드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며 새삼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 어린 딸들을 당구로 이끈 아버지 차성익 씨(가운데).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렸을 때부터 언니 차보람은 ‘예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항상 옆에 있는 동생만 빛이 났고 어른들도 동생한테만 관심을 표현했다.
“한 번은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봤어요. 제 얼굴이 그리 못 봐줄 정도는 아니더라구요. ‘나도 이 정도면 괜찮은데…’하며 위안도 해봤죠. 하지만 유람이와 같이 있을 때는 전 너무 평범해 보여요. ‘난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하는 자책도 많이 했어요. ‘예쁘다’는 소릴 못 들어본 저로선 유람이의 인기와 대중들이 보내는 사랑이 부럽기도 하지만 당구 실력으로 기죽지는 않아요.”
비슷하게 시작한 당구였지만 보람이 2004년 대학 진학을 위해 잠시 쉬는 동안 유람은 부쩍 성장한다. 2003년부터 전국대회에서 1위에 오르기 시작하더니 2004년 풀사랑9볼오픈 1위, 2005년 한국여자3쿠션대회 1위에 이어 국내 프로랭킹 1위에 올랐고 지난 12월에 있었던 도하아시안게임에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됐다. 지난 3월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실시한 최고 인기 여자 스포츠 부문에서 김연아 박세리 미셸 위 김미현에 이어 차유람이 뽑혔을 정도로 비인기 종목인 당구 선수로서 차유람의 대중적인 인기는 단연 돋보인다.
“지난번 언니랑 맞대결을 벌였어요. 2년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서로 차이는 있었겠죠. 제가 이겼는데 언론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시각이 너무 이상했어요. 동생 때문에 언니가 치인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내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전화를 걸어 항의할 생각까지 했어요. 우린 친구도 아닌 친자매지간이에요. 누가 누구 때문에 잘되고 못되고 하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언니도 많이 속상했을 거예요.”
차유람은 다른 선수한테 지는 건 참을 수 없지만 언니한테 지는 건 ‘괜찮다’고 한다. 차보람도 마찬가지. 2년을 쉬다 나왔으니 동생한테 지는 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속상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안 든다. 그래도 승부의 세계에서 승자와 패자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패한 언니에게 억울하지 않았느냐고 재차 물었다. 차보람은 “아직은 억울하지 않다”면서 “내가 실력을 키운 후에 대등한 관계에서 벌인 게임이었다면 속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테니스에서 당구로 진로를 변경한 두 자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바로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사실. 보람이 고1 때, 유람이 중2 때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정형화된 학교 제도와 획일적인 교육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당구 선수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던 학교와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두 자매의 용기와 결단도 대단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믿고 허락해준 부모님의 의지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