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희 감독 만들기’에 적극 나섰던 것으로 알려진 김유택(왼쪽). 오리온스의 새 사령탑을 맡은 이충희 감독. | ||
수많은 배신이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요즘 세상이지만 최근 프로농구계에서 벌어진 두 스타 지도자의 인생극장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바로 아시아 최고의 슈터와 센터로 이름을 날렸던 이충희 대구 오리온스 감독(48)과 김유택 XPORTS 해설위원의 얘기다. 그 단면을 잘 보여준 이번 사건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어떤 책을 읽다 보니 ‘살면서 남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한 열 개쯤 나와 있었어.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것들은 내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자주 사용한 말들이었어. 7년 동안 프로농구를 떠나 있으면서 정말 많이 깨달았지. 진짜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할거야.” 오리온스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이충희 감독이 사석에서 한 말이다. 농구인 이충희의 현재 심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이 감독은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현역시절 ‘신이 내린 슈터(신사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활약했고, 지도자로도 대만에서 우승, LG(1997~2000년)에서 준우승 등 호성적을 냈다. 깔끔한 외모에 성실함과 능력을 고루 갖췄다.
하지만 확실한 단점 하나가 그를 7년이나 프로 코트 밖으로 내몰았다. 남, 특히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남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농구계에서는 이 감독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들었고, 번번이 불필요한 오해에 휩싸였다.
김유택은 농구계에서 이충희 감독을 가장 잘 아는 후배다. 장·단점은 물론이고 작은 단점 때문에 큰 장점이 가려진다는 것도,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충희 감독만큼은 아니지만 자신도 스타 출신으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충희 감독의 오리온스행은 지난 14일 오후 공식 발표됐다. 김유택은 전날인 일요일까지 최근 한 달여 동안 일주일에 5~6번이나 이 감독을 만났고, 전화통화는 수시로 계속했다. 모든 면에서 ‘7년 만의 귀환’이 확실해 보였는데 이 감독이 “아직 확정 통보를 받은 게 없다”고 말해 안달이 나기도 했다.
결국 14일 최종발표가 나왔고, 코치는 김유택 대신 김상식 전 KT&G 코치(39)였다. 발표 직후 이 감독은 김유택에게 전화를 해 “미안하다. 구단이 미리 코치를 정해놓고, 얘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김유택이 “최소한 언론 발표가 나기 전에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이 감독은 “오늘 아침에 들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오리온스의 김백호 사무국장은 “이충희 감독이 (김상식을) 원했다”고 답했다. 이충희 감독의 설명과는 정반대다. 한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황상 오리온스 구단 측이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김백호 국장도 이전에 “이충희 감독을 모시면 코치는 김유택으로 하겠다”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구단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김상식 카드를 받아들인 이충희 감독이 이후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형태로든 인연의 끈이 없는 김상식과 한살림을 차리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도의적인 면에서 김유택을 버리는 게 양심의 가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충희 감독은 아차 싶었고, 김유택에게 “내가 생각이 짧았다. 물은 엎질러졌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너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겠다”라며 대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이충희 감독과 오리온스 구단이 추가로 김유택을 코치로 기용할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새로운 이충희 감독’이 시작부터 실수를 했다는 점, 그리고 다른 것은 미NBA를 따라 하면서도 ‘감독을 감시하는 코치’를 쓰고 싶어 하는 한국프로구단의 속내를 여실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감독과 오리온스의 다음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농구의 본고장 미국은 코치만큼은 철저하게 감독이 뽑는다. 그리고 대학농구와 같은 아마추어인 경우 심지어 감독이 자기 연봉의 일부를 들여 코치를 기용하기도 한다.
유병철 스포츠 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