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영. 연합뉴스(왼쪽), 지은희. 사진제공=KLPGA | ||
한살 차이인 지은희와 박희영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가까웠다. 둘뿐만 아니라 함께 국가대표를 지낸 최나연(20) 송보배(21)까지 모두 ‘국가대표 4인방’으로 불리며 부모들까지 호형호제하는 ‘식구’가 됐다. 특히 수상스키 국가대표 감독 출신의 지영기 씨(53)와 대학 체육과 교수인 박형섭 씨(46)는 같은 체육인 출신으로 유독 가깝게 지냈다. 2004년 프로에 데뷔해 바로 정상에 오른 송보배가 먼저 떨어져나갔고, 2006년 최나연이 ‘얼짱 골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지-박’ 두 집안은 더욱더 가까워졌다. 아버지 지 씨와 박 씨는 나란히 딸의 캐디를 했는데 고독한 골프 대디 생활에서 저녁마다 서로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위로하는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대회 출전 때는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가족 식사도 대부분 함께 했다. 선수들이 절친한 것은 물론이어서 함께 연습라운딩을 하고 서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야말로 ‘선의의 경쟁자’의 표본격이었다.
사실 이번 해프닝도 절친했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날 우승컵을 놓고 챔피언조에서 동반플레이를 하게 된 두 선수는 긴장감을 뒤로 한 채 티오프전 연습그린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어프로치 연습을 했다.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이렇게 하기 힘들다. 가뜩이나 바로 전 대회에서도 챔피언조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 1타 차이로 지은희가 우승, 박희영이 준우승을 차지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골프대회를 일찍 마치고 일반 손님을 받기로 한 골프장 측이 서둘러 경기에 나서라고 독촉했고 둘은 함께 뛰다시피 1번 홀로 이동했다. 출발 텐트에서 스코어카드를 받고 부랴부랴 경기에 나섰는데 둘 다 자신의 웨지를 텐트에 놔둔 채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를 본 경기위원이 “지은희에게도 전달해 달라”며 박희영에게 웨지 2개를 건넸다. 박희영은 클럽을 자신의 캐디에게 줬고, 캐디는 아무 생각 없이 지은희의 웨지까지 2개를 모두 챙겨 넣었다. 하지만 1번홀(파5) 세 번째 샷 때 지은희는 웨지가 없음을 깨달았고, 금세 그것이 바로 박희영의 백에 있음을 확인했다. 골프 규정상 선수는 라운딩 때 골프클럽을 14개까지 지닐 수 있다. 하나라도 초과하면 부정행위로 2벌타를 받는다. 박희영은 이 홀에서 버디를 잡았지만 벌타 때문에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후 18번홀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지만 동타를 이뤘고, 연장전 끝에 지은희가 우승컵을 차지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승컵의 주인공이 바뀌자 언론은 지은희의 웨지를 ‘트로이의 목마’로 부르고, ‘박희영의 눈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크게 보도했다.
마침 당시 지은희의 캐디는 부친 지영기 씨였고, 박희영은 전문 캐디를 썼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박희영의 캐디가 저지른 것으로 지은희 쪽에는 전혀 책임이 없다. 하지만 박형섭 씨는 못내 서운했다. 실력으로는 이겼는데 다른 변수로 시즌 첫 승이 날아갔으니 어느 부모인들 속이 타지 않을까.
그런데 모 정상급 선수의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 당시 캐디를 보던 지영기 씨가 나서서 박희영에게 벌타를 줘야한다며 분위기를 잡았다고 입방정을 찧었다. 박형섭 씨에게는 울고 싶은 때 뺨 때려준 꼴이었다. 직접 대면해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감정이 폭발했고, 지영기 씨에게는 일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이제 지영기 씨가 서운해졌다.
“당시 챔피언조인 까닭에 다수의 갤러리가 있었다. (박)희영이 일인데 내가 어떻게 소리 높여 문제를 삼을 수 있겠는가. 프로 데뷔 후 2년간 우승 복이 없어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그래도 먼저 우승한 희영이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동고동락해왔다. 골프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씁쓸하다.”
이에 대해 박형섭 씨는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처음에는 많이 속상했다. 은희네 잘못은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전처럼 가까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둘은 신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두 대회 연속으로 챔피언조에서 함께 경기하며 1, 2위를 차지했고, 기막힌 사건까지 벌어졌으니 언론과 구경하는 처지에서는 한층 재미있어진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 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