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리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한다. 그의 도전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로이터/뉴시스 | ||
수화기 저 편의 ‘요술 공주’ 목소리는 심신의 피곤함과는 달리 아주 밝았다. 박세리(30)는 이날(이하 현지시간 6월 7일) 10년간의 미국 생활 중 가장 긴장된 상태로 18홀을 돌았고 동양인 최초 명예의 전당 입회 자격을 마침내 획득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했고 축하 기념식에서는 후배들로부터 케이크 세례를 받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후에도 축하전화를 받느라 바쁘기만 했다.
지칠 만도 했지만 명예의 전당은 그래도 새로웠다. 캐롤린 비벤스 LPGA 커미셔너의 말 그대로 “아직 30세도 안 된” 한국의 아가씨(박세리의 생일은 9월 28일)가 아시아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 입성을 이룬 뜻 깊은 하루였다.
특별한 날이었지만 축하 파티와 인터뷰 홍수를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했다. 오전 9시 16분 티타임을 맞추기 위해 이른 아침인 5시 30분께 눈을 떠 ‘명예의 전당’의 날을 맞았다. 룸메이트인 동생 애리 씨의 도움을 받아 방 정리를 마치고 경기복으로 출전 준비를 마쳤다. 어떤 옷을 입을지는 며칠 전부터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전날 골라 놓았던 서너 개의 ‘후보’ 중 평소와는 달리 다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검은색 실크 스타일의 티셔츠를 선택했다. 박세리의 의상은 친언니 유리 씨가 준비한다.
박세리는 간단한 아침식사 후 연습그린과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훈련을 했다. 한국에서 온 매니저 이성환 씨(세마스포츠 대표) 및 기자들과 조우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가볍게 인사를 했다. 박세리는 “긴장하지 않기 위해 명예의 전당이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대부분 LPGA 식구들은 연습라운드와 프로암 등을 통해 미리 축하인사를 했기에 아침인사에서 명예의 전당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베스 다니엘이 말을 꺼내 갑자기 극도로 긴장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다니엘도 명예의 전당 멤버였다.
박세리답지 않게 크게 긴장한 가운데 드디어 1번 홀. 티샷에 앞서 박세리를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멘트에 유난히 힘이 실려 있었다. 박세리는 이제껏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티샷을 날렸다.
성적은 버디 없이 보기 1개로 1오버파 공동 47위에 그쳤지만 샷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이 대표는 “이제 샷은 완전히 슬럼프를 탈출했다. 18홀을 따라다니며 지켜봤는데 드라이버샷과 아이언샷 모두 거리와 방향성이 좋았다. 전성기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단 퍼팅 감각이 나빠 스코어를 줄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너무 멍해서 18개 홀을 어떻게 돌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박세리는 스코어카드를 제출한 후 미국의 골프채널 생방송에 등장, 인터뷰를 했고 이어 미디어텐트에서 축하기념식을 가졌다. 경기를 끝낸 한국선수들이 몰려왔고 케이크 커팅과 인터뷰, 축하 인사 등 1시간이 넘도록 명예의 전당 입회를 축하했다. 기념식 후 한국미디어와 추가 인터뷰를 한 박세리는 이후 다시 연습그린과 드라이빙레이지를 오가며 샷을 가다듬었다. 컷오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념비적인 대회에서 스코어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이 연습에 열중한 것이다.
박세리는 “미국에 올 때 가졌던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지만 아직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캐리어 그랜드슬램(4대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것)과 올해의 선수상을 꼭 받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나비스코챔피언십 우승컵 추가가 필요하고 10년 동안 올해의 선수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멤버 중 올해의 선수상을 받지 못한 선수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좋은 성적을 냈지만 내가 잘 친 시기는 (아니카) 소렌스탐의 최전성기와 일치했다. 1년에 5승을 거두고도 올해의 선수상을 받지 못했다. 2위만 4번인가 했다. 꼭 올해의 선수상을 받겠다.”
10년 전 미국으로 떠날 때 첫 목표를 밝힌 것처럼 박세리는 자신의 새로운 목표 달성을 분명하게 예고했다.
끝으로 박세리는 팬들에게 대한 감사의 뜻을 꼭 써 달라고 주문했다. “2년이 넘도록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릴 때 팬들의 격려가 정말 큰 힘이 됐다. 골프가 너무 힘들고 대회마다 망신을 당하는 데도 많은 국민들이 박세리를 잊지 않고 걱정하고 또 응원해줬다. 한국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세리 언니, 힘내세요’라는 말을 듣고 울컥한 적도 있다. 진심으로 오늘의 영광을 고국의 팬들과 함께 하고 싶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