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부영 대표팀 감독(오른쪽)과 하승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최 감독은 팀을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3위에 올려놓았다. 연합뉴스 | ||
“농구인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세계대회나 올림픽 진출은커녕 아시아에서도 중위권으로 전락할 수 있다. 프로와 아마의 대동단결, 상비군 및 전임감독제 실시, 대표팀에 대한 과감한 지원, 그리고 지속적인 세대교체 수행 등 난제들을 하루 빨리 풀어야 한다.”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를 마치고 지난 7일 귀국한 최부영 국가대표 감독이 여름휴가를 가기에 앞서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위기의 한국농구를 진단했다.
‘최부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맹장’이다. 졸전을 펼친 날, 선수들을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휘경동 경희대까지 뛰어가게 한 것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 졸업하고 프로에 온 한 선수가 최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오자 벌떡 일어나서 차렷 자세로 받아 화제가 된 일도 있다. 일부에서는 선수들을 너무 혹독하게 다룬다는 비판도 있으나 평범한 선수들을 가지고 경희대를 대학농구 정상권으로 이끈 것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스파르타 최부영’은 홍콩 영화배우 홍금보를 닮은 넉넉한 풍채와 함께 경희대 농구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최 감독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더 있다. 먼저 그는 유명한 ‘성실맨’이다. 국가대표 슈터로 활약했던 선수 시절은 물론 지도자로도 그만큼 성실하게 운동하고 지도하는 사람은 농구계에서 드물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20년이 넘게 경희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도 최 감독의 성실함을 잘 대변한다.
최 감독은 또 달변이다. 어떤 일이든 아주 논리적으로 막힘없이 해법을 풀어낸다. 유머 감각까지 뛰어나 어떤 자리든 좌중을 휘어잡는다. 아마추어 농구계에서 핵심 인사로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최부영 감독이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인터뷰에 나섰다. 1시간이 넘도록 한국농구를 섬세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분석했다.
“욕 먹을 각오로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다. 성적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한국농구의 세대교체라는 큰 과업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5위를 한 아시안게임 직후에는 정말이지 비난이 너무 거셌다. 최부영이 한국농구를 말아먹는다는 심한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번 ABC(아시아선수권)를 끝내자 젊은 선수들을 정말 잘 키웠다는 식으로 여론이 많이 바뀌었다. 한 프로 감독은 전화로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한국농구는 세대교체가 늦어져 국제경쟁력을 잃었다. 당장 성적이 나쁘더라도 세대교체는 계속 추진해야 한다.”
최 감독은 이번 ABC대회에서 돌풍의 팀이었던 카자흐스탄은 20세 전후의 선수들이 주축이었고, 이란 레바논 등도 30대 선수가 불과 두 명뿐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더 이상 농구대잔치 시절의 ‘라디오 스타’들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로선수들의 대표팀 기피 현상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와는 다른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다. 즉 어차피 프로선수들이 프로리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데 무조건 선수들의 애국심에만 호소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당근과 채찍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대표선수들에게는 농구협회와 KBL이 협력해 일정 수준의 수당을 줘야 한다. 반면 진단서만 가지고 오면 대표팀에서 빼주는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 대표팀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KBL 리그 출장정지 등 중징계를 줘야 한다.”
대표팀 운영은 어떨까. 이 대목에서 최 감독은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문제를 풀려면 행정이 제대로 돼야 한다. 그런데 농구협회와 KBL이 해도 너무 한다. 축구처럼 상비군제도를 만들고 전임 감독을 두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다. 모두 돈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토토가 활성화되면서 60억 원에 달하는 가욋돈이 생겼다. 한 4억 원 정도만 투자해도 감독과 코치 2명, 그리고 전담트레이너 등 상비군을 멋지게 운영할 수 있다. 우리보다 경기력이 떨어지는 일본은 ABC대회를 앞두고 유럽전지훈련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농구선수들은 대부분 신체특성상 항공도 비즈니스클래식을 이용한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대표팀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한국은 2m가 넘는 선수 4명만 비즈니스를 타게 해 준다. 이렇게 푸대접하면서 잘하라고 요구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 한국농구의 미래는 어떨까. 최 감독은 “선수들은 예전보다 훨씬 좋다”고 강조했다. 하승진은 이번 대회를 통해 아시아 정상의 센터로 성장했고 양희종 김민수 이동준 강병현 박찬희 등이 경험치를 크게 높였다.
“이렇다 할 슈터 없이 센터와 가드진만 가지고 3위를 했으니 잘 가꾸면 앞으로 한국농구는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특히 하승진은 대표팀 소집기간 동안 매일 경희대에서 운동하면서 거듭났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강정수 대표팀 코치는 대표팀 소집훈련이 끝나도 당분간 경희대에서 운동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방성윤에 대해서도 최 감독은 “대표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정신 자세를 바르게 잡아 대표팀에 합류하면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감독은 “문제는 행정력”이라고 진단했다. 우수한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농구협회와 KBL의 엉성한 행정 때문에 한국농구가 뒷걸음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농구가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주장이다. 대표팀에 대한 과감한 지원, 철저한 선수관리 등이 이뤄지면 오히려 한국농구는 역대 최강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참 욕 많이 먹었지만 14개월 동안의 국가대표 감독직을 수행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14개월의 실험은 성과가 많다고 생각한다. 성적이 나쁜 것은 내가 욕을 먹겠다. 확실한 것은 세대교체와 대표팀 체질 개선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 뒤를 이어 좋은 전임 감독이 나타나 대표팀의 중흥을 이끌기를 바란다.”
최 감독은 다시 대표팀을 맡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 정도 욕먹었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반문으로 응수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