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화 감독(38·KRA). 어느덧 지도자 생활만 12년째를 맞고 있지만 그를 만나면 여전히 한국 여자 탁구계를 주름 잡던 ‘탁구 여왕’의 이미지가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 은퇴 후 한국마사회(지금의 KRA) 코치로 첫 발을 내딛었던 그는 지난 8월 초 11년 만에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이미 2002년부터 여자대표팀 코치를 맡았고 2005년부터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지만 소속팀에서 단계를 밟아 감독이 된 부분은 그의 성실성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2008베이징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아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현정화 감독. 지난 8월 하순 그를 만나 20년 만에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올림픽 메달 색깔에 도전하는 소감을 들어봤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곳만 네 군데예요. 대표팀과 소속팀 그리고 실업연맹과 가정주부라는 자리까지…. 다 잘하려다보니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모두 탁구와 관련된 부분이었고 일과 연관된 상태라 그걸 앞세우다 보면 매번 가정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래도 현정화 감독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가볍게 넘어가고 싶어 한다.
현 감독의 대답을 듣다가 대전 시티즌의 김호 감독이 ‘지도자는 결혼을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한 내용을 전하자 그는 어느 부분에선 공감을 하면서도 “하지만 가족이 없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일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일하면서 얻는 행복보다 가족을 통해 얻는 행복이 훨씬 큰 보람을 전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선수와 팀을 챙기다가도 아이들과 남편을 신경 써야 하는 게 결혼한 여성 지도자의 숙명이라는 그의 주장에 기자도 ‘백 퍼센트’ 공감을 했다.
“한때 잠시 지도자 생활에 회의와 갈등을 느낀 적이 있었어요. 두 가지(가정과 일) 다 잘 할 수 없는데 두 가지 다 잘 하길 바라는 게 이 사회거든요. 그래서 2004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 코치직에서 물러나려고도 했었죠. 지금은 그런 고민 안 해요.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여기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가정은 그 다음이에요.”
현 감독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혜택을 받는 일이 발생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정화라는 ‘네임밸류’와 명성으로 인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맥이 빠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 여자라는 이유로 동정을 원하지 않았어요.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것도 싫었죠. 그저 똑같이 경쟁해서 똑같이 평가받고 싶었어요. 그래야 진정한 승자가 되는 거 아닌가요? 실력이 있으면, 그 실력을 인정받는다면, 여자라는 이유로 못 할 것도 안 될 것도 없는 거잖아요.”
현 감독은 지난 8월 18일 대통령기전국탁구대회에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역시 현정화’라는 찬사를 이끌어냈지만 이날 복식경기 중 퇴장 명령을 받았다.
▲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현재 목표라는 현정화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현정화 감독은 지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한다고 해서 눈길을 모았다. 유남규 남자대표팀 감독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기 때문.
“어휴 말도 마세요. 전 원래 정치에 관심이 많지 않아요. 특히 누구 누구 후보를 지지하는 데 제 이름을 올리는 부분이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그런데 아는 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선 박근혜 전 대표 지지자로 제 이름을 넣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절대 그러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다음 날 신문에 제가 박근혜 후보 지지자로 이름이 나와 있는 거예요. 정말 당황스러웠죠. 가끔은 이 사회가 ‘이름’만 원하는 사회 같아요. 특히 정치권에서는….”
현 감독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도자에서 은퇴할 시기엔 또 다른 ‘도전’을 위해 뛰고 싶어 한다. 바로 올림픽 IOC위원. 이 목표는 처음으로 입 밖에 내는 것이라고 한다.
“일부러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래야 제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할 수 있잖아요. 굉장히 이루기 힘든 목표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이룰 것도 없는 자리예요. 해보고 싶어요. 해볼 자신도 있고요.”
88년 서울올림픽 때 양영자와 호흡을 이뤄 여자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현 감독. 꼭 20년 만에 대표팀 감독으로 신분을 달리한 채 또 다시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는 그는 남다른 자신감을 피력한다. 참으로 욕심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그이지만 선수와 지도자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면 개인적으론 ‘가문의 영광’이요, 국민들에겐 국가적인 경사일 수 있기에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자신을 채근한다.
현 감독은 12세 때부터 녹색 테이블에서 만난 유남규 남자 대표팀 감독과의 남다른 인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스갯소리 하나 해드릴까요? 어느 사이트에 제가 유 선생(유남규)이랑 부부 사이냐고 물어본 질문이 있더라고요(웃음). 제 탁구 인생의 좋은 동반자예요. 남규 오빠의 존재가 제 탁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거든요. 은근히 라이벌 의식이 발동돼서요. 선수 시절 때 유 선생이랑 스캔들도 났었어요(웃음). 이래저래 인연이 깊은데 유 선생이 조만간 좋은 소식 전해줄 것 같은데요?”
그 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개인적인 일이라 직접 물어보라며 말을 아낀다. 스포츠계의 유명한 대표 노총각, 유남규 감독에게 좋은 일이란 의미가 뭘까. 한 가지밖에 없다^^!
새침하고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털털하고 어울리는 것도 즐기는 현 감독이 기자와 헤어지며 ‘나중에 소주 한잔 하자’고 인사를 건넨다. 주량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취해 본 적이 없다’는 말로 선수를 친다. 은근히 경쟁심을 부추기는 재주가 남다르다. 다음엔 녹색 테이블이 아닌 술 테이블에서 서로의 주량을 직접 확인시켜 주기로 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