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현역 감독이…
지난 11월 29일 남자 프로배구 미디어데이 행사. 기자단의 질의응답시간에 김호철 감독이 손을 번쩍 들고는 “기자가 아닌 사람이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당시 진행을 맡은 연맹 관계자는 “안 된다”라고 답했지만 기자들의 지지(?)로 김 감독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질문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선수위원회 구성을 통해 후배들에게 혜택을 줄 생각이 없느냐?” 현대캐피탈의 주장 후인정은 “처음 프로리그를 출범할 때 몇몇 선수들과 논의한 바 있지만 의견 차가 많아 이뤄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결성될 일로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즌 중 선수들과 얘기해 보겠다”고 답했다.
통상 감독은 선수들보다 구단 및 연맹과 더 가깝다. 얘기만 나와도 구단과 연맹이 경기(驚氣) 반응을 보이는 선수단체 얘기를,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현역 감독이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호철 감독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발언 의도는 단순했다. 코보 측에 워낙 문제가 많아 선수들이 이 점에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최근 선수노조 결성 움직임까지 있다고 하니 나도 놀랐다”고 밝혔다. 선수단체 결성을 촉구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감독이 보기에도 선수들의 처우가 형편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프로농구를 벤치마킹한 프로배구는 계약금이 없는 연봉제, 샐러리캡(팀연봉총액상한제), 신인연봉상한제 등을 시행하고 있다. 모두 프로농구에서 선수들의 불만이 많은 제도들이다. 이런 독소조항들은 프로배구 쪽에도 그대로 적용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 훨씬 열악하다는 점에서 배구선수들을 자극하고 있다. 연봉은 전체적으로 농구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고(농구의 최고연봉은 김주성 6억 8000만 원, 배구는 후인정 1억 3000만 원), 자유계약(FA)제도는 아직 틀도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배구의 ‘김호철 발 선수위원회’는 최근 슈퍼루키 김요한의 드래프트를 통한 LIG 입단 거부 사건과 맞물리며 4개 구단의 주장들을 중심으로 한 ‘선수노조’ 설립 움직임으로 확대되고 있다.
#김요한 이상민 파동…
배구와는 무관하게 남자농구와 여자골프, 그리고 경륜 등에서도 선수단체의 자생적인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신인선수의 연봉이 최대 1억 원으로 묶여있는 남자농구에서는 한국인 첫 NBA(미국프로농구) 선수 출신인 하승진이 내년 1월 드래프트에 나오면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NBA 최저연봉이 3억 원이 넘는데 하승진이 1억 원을 받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르헨티나 특급’ 김민수(경희대), ‘중앙대 전성시대의 간판스타’ 윤호영과 강병헌, 차재영(고려대) 등 걸출한 신인들이 드래프트를 앞두고 있어 독소조항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하승진은 말을 아끼고 있는 가운데 김민수 등은 여의치 않을 경우 해외 진출까지 고려하고 있다.
농구에서는 이에 앞서 지난 5월 ‘이상민 파동’ 때도 선수단체 얘기가 나왔다. 자신도 소속팀도 원치 않는데 기형적인 FA제도 탓에 팀을 옮겨야 했던 이상민은 선수들은 물론이고 많은 팬들을 분노케 했다. 종목별로 선수협의회 구성이 어렵다면 이미 뿌리를 내린 프로야구선수협회 등을 중심으로 한국프로선수총연합회를 만들자는 말이 나왔다. 당시 이상민은 “타종목 선수들이나 법조계 등에서 제 2의 이상민과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도록 한국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총연합체 같은 것을 만들자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개인종목이고, 또 한국 프로스포츠 중 국제 경쟁력이 가장 뛰어난 골프에서도 선수들의 결집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미LPGA에서는 2007시즌 동안 정일미, 박세리 등 고참선수들을 중심으로 한국선수모임이 엉성하게나마 만들어졌고 정기모임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자는 뜻을 모았다. 이에 국내에서도 모 선수를 중심으로 선수노조를 구성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원래 프로골프의 협회는 선수들의 모임을 뜻하는데 최근 들어 스폰서와 방송사들의 입김에 되레 커져 선수들이 크게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데 문제인식을 함께 한 것이다. 한 국내 여자골프 관계자는 “선수협의회(가칭)에 관련해 논의가 오가고 있다. 빠르면 2008년 단체를 결성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야구선수협의 자부심
그럼 선각자인 프로야구선수협회는 어떨까. 선수 출신으로 이제는 한국야구계에서 선수권익분야의 개척자로 유명한 나진균 사무총장은 간단하게 답했다. “프로스포츠 선수들에게 사람답게 살고 싶으면 선수협의회를 만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 야구선수들이요? 정말 사람답게 삽니다.” 12월 5일 제주도 한라병원 대강당에서 정기대의원 총회를 열고 손민한을 제10기(4대) 회장으로 선출한 직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 응한 나 총장의 목소리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실제 얘기를 들어보니 2000년 1월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선수협회는 이제 일본과 미국에 연락사무소를 둘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1군은 물론 2군선수들까지 모두 클로우즈샵(의무가입)으로 전원 가입한 상태이고 총회나 대의원회의 등 각종 행사에 선수들은 100% 가까이 출석률을 기록하고 있다. 선수 개인이 연봉의 1%를 원천공제해 협회를 운영하고 있고 협회는 빚 좋은 개살구였던 연금의 현실화 등 그동안 많은 성과를 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 구단들이 생색을 내던 선수연금이 실제로는 은퇴 후 월평균 3만~4만 원에 불과하다는 허상을 밝혀냈고 이를 평균 50만 원 선으로 끌어올렸다. 장기적으로 프로에서 5년 이상 활동한 선수는 은퇴 후 월 100만 원을 받도록 할 계획이다.
나 총장은 “농구와 배구도 심각하지만 가장 심한 것은 프로축구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몇몇 선수들의 연봉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지만 전체적으로 생존권까지 위협받고 있는 프로선수도 많다. 프로야구선수협회는 타 종목 선수들이 원할 경우 최대한 협조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