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 여자 골퍼들의 부진으로 27개 대회 연속 무승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벙커샷을 하는 박세리. 사진공동취재단 | ||
“박인비가 2001년 미국으로 골프유학을 왔는데 미국선수들의 분위기가 예전에 듣던 것과는 사뭇 다르더라고요. 뭐 골프도 공부하고 비슷한데 보통 한국학생들이 더 독하고, 열심히 하잖아요. 그런데 인비 또래의 외국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운동했어요. 모건 프레셀, 폴라 크리머(이상 미국), 쳉야니(대만) 등이 경쟁자였죠. 예전처럼 한국선수들의 연습량이 더 많다고 쉽게 말할 수 없어요.”
미LPGA 투어 2년차로 올시즌 좋은 활약(상금 16위)을 펼치고 있는 박인비의 부친 박건규 씨(47)의 말이다. 1998년 박세리의 US오픈 우승 이후 미국 여자 그린에 거센 코리안 돌풍이 불었고, 이후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선수들이 눈에 띄게 운동을 많이 한다는 설명이다. 예전 미국 주니어선수들은 골프에만 매진하는 한국과는 달리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미LPGA는 물론이고, 주니어 무대에서 한국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식 골프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골프의 본고장 미국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프로무대를 목표로 하거나 대학도 한국식으로 학업보다는 기량이 뛰어난 우수선수를 유치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여자골프의 한국화’는 미LPGA 선수들 사이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최고참인 정일미는 “제가 처음 미국에 올 때는 월요일에 운동하는 미국선수를 보기 힘들었어요. 아예 이동일이라고 했죠. 부지런한 한국선수들만 일요일 오후 에 이동을 하고, 월요일에 운동하곤 했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달라요. 월요일 코스에 나와 보면 한국선수는 물론이고 출전선수 거의 대부분이 나와 있어요”라고 말했다.
▲ 김미현 | ||
이에 미LPGA는 투어 코스의 전장을 대폭 늘이기 시작했다. 비거리에서 우세한 자국 및 서양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단타자로 유명한 김미현은 “나 같은 선수는 우승하지 말라는 얘기냐”고 푸념하기도 했다.
실제로 코스길이 증가와 함께 서양선수들의 우승이 크게 늘었다. 전장이 대폭 길어지기 시작한 2006년 한국선수는 4승에 그친 반면 오초아, 수잔 페테르손, 브리타니 린시콤, 크리머 등 장타자들이 투어를 점령했다. 올시즌 극심한 부진도 한국선수들의 숫자가 무려 48명(조건부 12명)으로 미국 다음으로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심각성이 더 커진다.
미LPGA의 한 관계자는 “한국선수들은 이미 미LPGA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엄연히 미국투어인데 외국선수들이 득세하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죠. 장비 발달로 인해 코스가 길어지는 것은 미LPGA 뿐 아니라 미PGA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은 조건이기 때문에 코스 길이를 탓하는 것보다는 한국선수들이 실력으로 극복해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코리안 낭자부대 내부에도 문제가 있다. 숫자는 많지만 확실히 우승을 매조지할 간판선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 박세리 김미현 한희원 박지은 등은 어느 대회든 기회가 오면 우승컵을 차지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위권에 포진한 선수들은 많지만 정작 챔피언조로 나서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집중력이 강한 선수가 드물다.
▲ 장정 | ||
여기에 박세리의 성공이 든든한 후원시스템 확보로 이어지면서 한국선수들 사이에서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세리 등 1세대 선수들은 나름대로 부를 축적해 근성이 떨어졌고, 신예들은 시작부터 든든한 후원사와 함께 해 미국무대 성공이라는 절박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김미현의 부친 김정길 씨는 “예전처럼 인생을 걸고, 샷 하나 하나에 혼신을 담아 플레이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XPORTS의 김원섭 본부장은 “한국 여자골프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말했다. 최근 1년여 동안 여러 이유로 인해 집단 슬럼프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곧 정상궤도에 오를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LPGA와 한국 그린의 격차는 백지 한 장 차이이고, 신지애 유소연 등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국내파 선수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일요신문> 통신원을 지낸 LPGA전문 매니저 송영군 씨는 “코스의 변화나 외국선수들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에요. 살벌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외국선수들의 정신력이 강해요. 미국무대에서 성적을 내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수들도 매년 나타나고 있는 추세입니다”고 말했다. ‘한국 스포츠의 최대 수출품’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여자골프가 계속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 침체를 거쳐 더 크게 도약할 것인가. 2008년은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