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 자유형 400m에서 라이벌 그랜트 해켓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우승한 박태환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한국의 19세 소년 박태환이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경쟁자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한 것. 3분41초86. 자신의 종전 최고기록(3분43초59)을 1초73이나 훌쩍 앞당긴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장린(중국ㆍ3분42초44)과 라슨 젠센(미국ㆍ3분42초78)을 각각 0.58초, 0.92초 차이로 물리친 완승이었다. 호주의 ‘수영 영웅’ 그랜트 해켓(6위ㆍ3분43초84) 역시 박태환 앞에서는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20여 분 뒤, 금빛 레이스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태환은 세계 언론이 운집한 내셔널아쿠아틱센터 기자회견실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온 국민이 염원하던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은 그의 목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회견장 정중앙에 위치한 금메달리스트의 자리. 수줍은 듯 그 자리에 앉은 소년은 그제야 미소를 띠었다.
“어제 잠을 못 잤어요. 잠도 인터벌로 잔 거죠”라며 농담을 하는 박태환의 얼굴에서 비로소 소년다운 천진난만함이 배어났다. 자신을 친누나처럼 보살펴 준 박성원 코치에게는 “나 이제 집에 가도 되죠?”라며 농을 걸었다.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듯 홀가분한 박태환은 그렇게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즐겼다.
그리고 박태환은 첫 질문을 받았다. “‘한국의 류시앙’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중국 국제신문 기자의 질문이었다. 중국의 육상 영웅이자 세계 육상계의 빅스타 류시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박태환. 이제 그는 한국 수영의 간판 스타가 아닌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포츠스타, 세계 수영계의 찬란한 별이었다.
현장분석 ‘작전의 승리’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세 번째 턴을 하는 순간, 전광판에 뜬 3번 레인 박태환의 이름 옆에는 선명히 ‘1’자가 새겨졌다. 불과 150m 지점, 박태환은 1분22초45로 가장 먼저 턴을 했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박태환은 경기의 절반도 지나지 않아 선두로 치고 나왔다.
첫 50m를 4위로 끊은 박태환은 50m를 지나자마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50~100m 구간에서 8명 중 유일하게 27초대(27초83)를 기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박태환은 초반부터 승부를 걸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 그랜트 해켓(호주)이 박태환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4번 레인의 라슨 젠슨(미국)과 3번 레인의 장린(중국) 역시 페이스를 조절하며 박태환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박태환의 이른 스퍼트에 모두가 놀랐고, 또 불안해했다.
그러나 박태환은 250m 지점을 지나면서 2위 해켓과의 격차를 더 벌리기 시작했다. 300m를 지날 때는 해켓을 거의 1초 가까이 따돌렸다. 해켓은 더 이상 박태환을 쫓지 못했다. 초반부터 전력을 다해 박태환의 지구력을 소진 시키자는 해켓의 전략은 오히려 박태환의 초반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준 셈이 되고 말았다.
▲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 때 그제야 수줍은 소년의 미소를 비쳤다. 연합뉴스 | ||
박태환은 “초반부터 오버페이스를 하더라도 상대 선수들에게 뒤쳐지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막판에 스퍼트를 내는 내 스타일을 이제는 다른 선수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전략을 짰다”고 설명했다.
아빠 같은 노민상 감독
박태환이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하던 10일은 아침부터 베이징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창밖으로 바라보며 노민상 수영대표팀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도 비가 오는 날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박태환이었다.
박태환이 여덟 살 꼬마일 때부터 수영을 지도했던 노민상 감독. 그에게 박태환은 친아들이나 다름없었다. 노 감독은 말없이 손수 준비해 온 곰국을 데웠다. 그리고 태환을 방으로 불렀다. 곰국을 마시는 태환을 보며 노 감독은 뭉클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어젯밤 태환이가 저에게 와서 ‘은메달을 따도, 동메달을 따도 대단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할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너는 올림픽 결선을 뛰는 순간 역사를 쓰게 된다’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갓 대학교에 입학한 열아홉 박태환. 그런 박태환이 전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경기를 펼쳐야 하는 부담감은 노 감독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제자의 부담을 덜어주려 한 말이었지만, 금메달을 향한 염원은 그 누구보다 컸던 그다. 그래서 노 감독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자랑스럽게 시상대에 오른 제자를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박태환을 길러낸 노 감독은 박태환을 친아버지보다 더 잘 아는 절대적인 존재다. 박태환이 전담팀을 꾸려 태릉을 박차고 나갔을 때도 노 감독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집 나간 아이는 언젠가는 돌아오게 된다’는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 감독은 묵묵히 박태환을 주시했다. 박태환이 돌아오자 노 감독은 올림픽 금메달에 모든 포커스를 맞춘 24주 훈련 일정을 내놓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박태환의 금메달. 그 꿈을 실현시킨 노민상 감독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박태환을 ‘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노 감독은 “아이가 그렇게 부담을 갖는 것을 보고 가슴이 쓰렸습니다. 남은 종목에서는 ‘아이’답게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 감독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세계 수영계도 박태환의 나이가 아직 채 스물도 되지 않았음을 주목하고 있다. 노 감독과 박태환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4년 후를 향해, 또 그 이후를 향해, 한국 수영과 스포츠의 중심축이 되어 화려한 날갯짓을 해 나갈 것이다.
베이징=허재원 한국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