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이나 넘게 달려야 도착하는 ‘진시탄’이 ''봉달이''의 훈련 장소였다. 알고 보니 이봉주의 캠프는 중국 여자마라톤의 간판스타 저우춘슈의 코치가 개인적으로 임대한 별장이었다. 방이 10개가 넘는 별장 3개를 임대해 중국 육상장거리선수들을 키우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저우춘슈가 쓰던 방을 그대로 이봉주가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율훈련을 마친 이봉주가 방에서 휴식 중이라고 했다. 일단 얼굴부터 비췄다.
“어 왔어?”
이봉주식의 정말 짧은 인사다. 이봉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삼성전자 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봉주는 정말 책을 많이 읽는다. 일종의 직업병에 가까운 취미로 1년의 대부분을 집을 떠나 전지훈련을 하고, 또 대개는 해외 생활의 연속이라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17일) 저우춘슈가 동메달을 땄더라고. 룸메이트니까 너도 최소한 동메달은 따겠네?” 썰렁한 유머였다. 하지만 이봉주는 썰렁한 유머에도 잘 웃어준다.
이번 베이징올림픽은 가깝고 또 마지막인 만큼 가족들이 오지 않느냐고 묻자, “집사람과 아이들은 그저 그렇더라고 어머니가 무척 오고 싶어 했는데 뭐 여기서 돌봐줄 사람도 따로 없고 해서 아무도 안와”라는 답이 돌아왔다.
잠깐 나이 얘기도 했다. “알고 있어? 걔가 우리랑 동갑이라며?”
‘걔’는 전날 여자마라톤에서 우승한 루마니아의 콘스탄티나 토메스쿠다. 은근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꺼냈더니 이봉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너는 10월생이고, 걔는 1월생이야 한국식으로는 한 살 더 많은 거야.”
“그래?”
잠깐이지만 이봉주의 눈빛이 빛났다. 뭐 ‘마라토너로는 환갑의 나이’ 등 하도 나이 얘기를 많이 들어온 까닭에 모처럼 기분이 좋았나 보다.
아무리 친해도 마지막 레이스를 앞둔 대마라토너에게 ‘은퇴’ 이런 말은 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봉주가 먼저 은퇴 후의 계획을 풀어냈다.
“은퇴 경기는 꼭 하고 싶어.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유학 등 잠시 재충전 시간을 가진 후에는 지도자로 후배들을 잘 키워보고 싶어. 내가 맡을 팀이 있을까?”
▲ 39세 나이에 올림픽에 도전한 이봉주가 중국 전지훈련지 대련에서 마지막 훈련에 임하던 모습. | ||
같이 식사를 하고, 연습을 지켜보고, 그리고 선물 살 시간이 없다고 해 두 아들에게 줄 신발을 사다주고…. 이틀이 금방 지나갔다. 그 사이 이봉주는 소금도 없이 생고기를 구워먹는 식이요법을 마쳤다. 젊었을 때는 아홉 끼나 했지만 지금은 여섯 끼만 한다. 체내 탄수화물을 모두 태워버리기 위한 마라토너의 보편화된 식이요법으로 이 기간 신경이 무척 날카롭다. 하지만 스무 살부터 20년 가까이 마라톤을 해온 까닭에 이봉주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담담하게 식이요법을 마쳤다.
20일 오전. 이봉주의 마지막 훈련을 지켜봤다. 이제 10년이 넘도록 국민마라토너의 훈련장을 따라다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울컥했다. 턱수염이 있고, 선글라스를 끼고, 항상 오른손이 왼손보다는 아래로 처져 있고, 그리고 턱이 위로 올라오면 힘들다는 뜻. 촬영도 하지 않았지만 오래오래 이 모습을 기억하려고 유심히 쳐다봤다.
점심식사 후 2박3일간의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시간이 됐다. 인사를 하려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봉주야, 이 악물고 뛰어. 못 뛰어도 돼. 그냥 열심히 완주만 해.”
그렇지 않아도 ‘센티’한데 여기서 이봉주가 생각도 못했던 행동으로 기자의 감수성을 건드려버렸다. 이봉주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더니 기자의 손을 꼭 쥐었다. 택시에 오르는데 눈물이 났다.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을 이렇게 오래하더니 사람 울리는 재주도 있네.’
24일 오전 이봉주는 약속을 지켰다. 네 번의 올림픽 중 가장 나쁜 순위인 28위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골인점까지 들어왔다. 세계 각국의 쟁쟁한 마라토너인 98명의 출전선수 중 22명이 중간에 포기했는데 서른아홉의 봉달이는 42.195km를 달렸다. TV화면에는 안 나왔지만 40위권까지 처지다 막판에 10여 명을 따라잡는 자신만의 역주도 보여줬다.
‘봉주야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