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민은 올림픽을 통해 ‘국내용’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큰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훈련을 마친 윤석민에게 “축하한다”며 악수부터 나눴다. 예의 그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기자 앞에 마주 앉은 윤석민은 “올림픽은 지난 일이다. 지금은 시즌을 잘 치르는 게 중요하다”며 올림픽을 ‘어제 내린 눈’처럼 과거형으로 몰고 갔다.
‘윤석민 어린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어린 나이에 순박한 외모로 친근감을 더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애늙은이 같은 차분함과 진중함이 자리해 있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지 이틀밖에 안 된 터라 얼굴 전체에서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윤석민은 너무나(?) 말짱한 모습으로 기자 앞에 나타났다. “피곤하지 않느냐?”는 인사말에 “쉬진 못했지만 팀 성적을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라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올림픽대표팀의 든든한 마무리에서 KIA 에이스로 돌아온 윤석민의 올림픽 추억을 지면에 옮겨본다.
―다시 소속팀으로 돌아왔어요. 아직은 KIA 유니폼보다 대표팀 유니폼이 더 익숙할 것도 같은데요.
▲올림픽은 벌써 잊혀가요. 하루면 다 잊는 것 같아요. 솔직히 내 주변에 병역 면제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금메달 땄다고, 병역 면제 혜택 받았다고 좋아하고 생색내기가 좀 그래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마인드 컨트롤 중입니다.
―올림픽에서 2승1세이브를 올렸어요. 그걸 정규리그 승수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베이징에서 선수들이 그런 말을 했었어요. 현재 12승(8월 27일 기준, 8월 28일 1승 추가)째인데 올림픽에서 이룬 2승을 보태면 14승, 다승 1위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얘기였죠. 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 웃고 넘겼어요.
―이번 올림픽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뭘까요? 평소 상대팀 선수들과 두터운 친분을 나눴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때도 다른 팀 선수들과 가깝게 지냈어요. 그런 점보다는 큰 무대, 국제무대에서 미국, 일본 같은 강팀을 상대해봤다는 경험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선배들도 한국시리즈 경험을 베이징에서 미리 해본 셈이라며 격려를 해주시더라구요. 하지만 미국전에서 저질렀던 그런 실수는 다시 반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미국과의 경기에서 6-5로 쫓긴 9회 초 무사 2, 3루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섰어요. 당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제가 대표팀 경험이 없잖아요. 있다면 2002도하아시안게임에서 일본 사회인 야구팀이랑 중국을 상대해본 것 외엔 올림픽같이 큰 대회는 처음이었어요. 미국이란 팀도 처음 봤고 선수들은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였죠. (한)기주가 마무리를 맡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도 다 풀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호출 받고 (마운드에) 올라서는데 정말 긴장되더라구요.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된 상태에서 올라갔다면 그렇게 떨리진 않았을 거예요. 그러다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잖아요.
윤석민은 첫 타자 존 갈을 삼진으로, 후속타자 제이슨 닉스를 2루수 플라이로 처리하며 영웅이 될 뻔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남겨 놓고 통한의 2타점 역전타를 허용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 상대가 미국의 4번타자 매튜 브라운이었어요.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 가운데로 몰리는 실투로 2타점 좌전 적시타를 허용했거든요.
▲그 공을 던지고 나서 어찌나 제 자신이 한심하던지….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해서는 안 될 짓이었죠. 그런 공은 멍청이도, 초등학생도 안 던지는 공이에요. 만약 9회 말에 우리가 역전승을 거두지 못했더라면 전 두고두고 ‘역적’으로 몰렸을 거예요. 막판에 저 때문에 대표팀에서 밀려난 (임)태훈이한테도 면목이 안 서는 일이었겠죠.
▲ 올림픽 야구 준결승에서 일본전을 승리로 마무리한 윤석민이 포수 강민호와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김)광현이가 6회 말로 물러나고 제가 중간계투로 올라갔었죠. 일본의 4번타자 아라이였는데 슬라이더가 가운데로 몰리면서 투런 홈런을 맞고 말았어요. 하지만 미국전에서의 2타점보다는 마음이 편했어요. 공이 미국전처럼 많이 몰리지도 않았구요.
―일본과의 준결승전이 끝난 뒤 더그아웃에서 통곡했다면서요?
▲(웃으며) 제가 울려고 울었던 게 아니라 벤치로 돌아가니까 모든 선수들이 울고 있는 거예요. 우는 걸 보니까 가슴이 복받치더라구요. 처음에 대표팀에서 탈락한 뒤 저보다 부모님이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주위 선배들도 ‘힘내라’며 위로도 해주셨구요. 그럴 때마다 내색은 못 하고 정말 미칠 것 같더라구요. 그때 그런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눈물을 쏟게 했어요. 진짜 힘들었는데, 드디어 해냈다는 느낌도 들었구요. 선수들이 똘똘 뭉치니까 이런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구나, 정말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같은 팀 이용규랑 룸메이트였던 윤석민은 일본과의 준결승전이 끝나고 선수촌으로 돌아와선 둘이 부둥켜안고 소리만 질러댔다고 말한다. 예선전에서 아라이한테 홈런을 맞은 아픔도, 미국전에서의 실투도 모두 용서가 될 만큼 일본전에서의 승리는 짜릿함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했다는 게 윤석민의 설명이다.
―선수촌 생활을 했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마치 중·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어요. 빨래도 직접 챙겨야 하고 밥 먹으러 식당까지 걸어가야 하구요. 거긴 호텔이 아니니까 우리가 직접 다 챙겨야 했어요. 무엇보다 세탁 문제가 가장 괴로웠어요. 도하아시안게임 때는 지하에 20대의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면 됐지만 이번엔 빨래 봉투에 세탁물을 담아서 세탁소에 맡기면 되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선수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세탁물 찾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예요. 오전 10시 30분에 게임을 하려면 선수촌에서 7시에는 출발해야 해요. 막내인 전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빨래를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도 1시간 넘게 기다렸으니 경기장 가면서 얼마나 피곤했겠어요.
―선수들 빨래를 모두 담당했던 거예요?
▲아니에요. 아파트의 각 호마다 방이 3개씩 있었고, 2인1실을 썼기 때문에 전 6명 선수들 빨래만 담당했어요. 학교 다닐 때 다 해 본 일이라 어렵진 않았는데 빨래 나오길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했죠. 잠도 부족했구요.
―이번에 대표팀 선수단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면서요? 환상적인 팀워크를 이뤘다고 하던데요.
▲정말 그랬어요. 형들이 먼저 후배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셨어요. 먼저 말을 걸고 장난 쳐 주시고, 아주 편하게 대해주시니까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더라구요. 그중에서도 이승엽 선배는 정말 최고였어요. 운동을 같이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그전에는 대단하다, 멋있다 이런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같이 지내보니까 그 형이 야구를 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성격 정말 끝내줘요. 우리 같으면 방망이 안 맞는다고 고개 떨구고 다니면서 고민에 빠졌을 텐데 선배님은 속으론 힘드셨을지 몰라도 겉으론 절대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배울 점이 너무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김경문 감독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물어보았지만 지도자에 대해 선수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대답을 거절했다.
―이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만난 셈이에요. 대표팀에서 동고동락했던 선수들과 상대팀 선수로 만나는 기분이 남다를 것 같아요.
▲자기 할 것만 하면 되잖아요. 마음 속으로 응원은 해주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되겠죠. 그렇게 어색하진 않아요. 베이징은 올림픽이었고 한국에선 프로야구니까요.
―일주일만 쉬었더라면 경기를 치르는 데 훨씬 부담이 덜 했겠어요.
▲그렇진 않아요. 지금 제 성적도 좋고 컨디션도 좋고 기분이 업된 상황이라 빨리 빨리 경기를 치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 분위기를 그대로 끌고 가야죠. 만약 올림픽에서 성적이 안 좋았더라면 몸과 마음이 지쳐서 다 쉬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마운드에 오르는 게 너무 좋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올림픽은 어제의 추억입니다. 더 중요한 게 시즌이기 때문에 팀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동안 많은 성원을 보내준 KIA 팬 여러분들께 보답할 만한 팀 성적을 내지 못해 아쉬워요. 끝까지 최선을 다할 테니까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 부탁드릴게요. 참, 그리고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저한테 자꾸 ‘윤석민 어린이’라고 하시는데 저, 그 말 너무 싫거든요. 좀 근사한 별명 좀 지어주시면 안 될까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