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29일 올림픽 남자핸드볼 최종 평가전 한국 대 폴란드 경기 중 정의경이 폴란드 졸탁의 수비를 피해 강슛을 시도하고 있다. 남자핸드볼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아쉽게 8위에 그쳤다. 뉴시스 | ||
그러나 같은 시간,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이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베이징올림픽 대표 선수들은 묵묵히 여장을 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온 나라가 올림픽의 열기에 뒤덮인 ‘올림픽 서머’. 그러나 메달리스트들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한국은 그야말로 ‘메달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메달 공화국’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나머지 선수들은 철저한 조연, 아니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도 4년의 시간을 올림픽만 바라보며 불암산 기슭 태릉선수촌에서 젊음을 바쳤던 태극전사들이다. 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숭고하고 열정적인 땀방울을 흘려 왔던 그들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수영
“박태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정슬기(20·연세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울었다. 세계 각국 취재진들이 줄지어 선수들을 기다리는 공동취재구역. 이른바 ‘믹스트 존’(mixed zone)이라 불리는 이 공동취재구역이 정슬기에게는 끝도 없이 멀어 보였다.
박태환이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날 수십 명의 한국 기자들이 앞다퉈 취재 경쟁을 벌였던 공동취재구역. 그곳에 정슬기가 경기를 펼친 날에는 한 손으로 꼽을 만한 기자들이 이따금씩 서있었다.
그리고 기자들은 정슬기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아직 물도 마르지 않은 얼굴에는 분명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어렵게 한걸음 한걸음을 딛는 스무 살 소녀에게 “왜 이렇게 부진한 성적이 나왔느냐”고 매몰차게 물을 수 있는 기자는 없었다.
베이징올림픽 여자 평영 200m 준결승이 열린 14일 베이징 내셔널아쿠아틱센터. 정슬기는 16명의 준결승 진출자 가운데 11위에 그쳤다. 2분26초83. 터치패드를 찍은 후 전광판을 확인한 정슬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50m 트랙을 두 번 왕복하는 동안 정슬기 자신도 부진한 기록이 나올 것을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자신의 한국기록인 2분24초67에 무려 2초16이나 뒤진, 최악의 기록이었다. 박태환과 함께 베이징올림픽 수영에서 값진 메달을 목에 걸어줄 것을 기대한 터라 정슬기의 준결승 탈락은 충격적이었다.
▲ 수영의 정슬기(왼쪽)와 사격의 이호림. | ||
정슬기는 올림픽을 앞두고 가파른 기록 행진을 거듭했다.태릉에서 열린 자체 시뮬레이션에서는 2분 23초대까지 끊어 코칭스태프를 흥분케 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올림픽을 코 앞에 두고 컨디션 조절에 주력해야 할 때, 정슬기는 눈 앞에 보이는 올림픽 메달을 향해 욕심을 냈다. 웨이트트레이닝 시간을 늘리고 강도 높은 훈련을 무리하게 소화했던 게 정작 올림픽에선 컨디션 난조로 나타났다.
정슬기는 이제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간다. 베이징에서의 값진 경험은 정슬기로 하여금 쉴 때와 운동할 때를 구별하는 법을 알려줬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 위한 값진 시련을 겪은 정슬기. 그는 벌써 내년 로마 세계수영선수권, 그리고 4년 후 런던올림픽을 벼르고 있다.
사격
1988년 7월 22일생. 서울올림픽 개막(9월 17일)을 두 달 정도 앞두고 태어난 ‘올림픽둥이’였기 때문일까. 이호림(20·한국체대)의 인생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해마다 중대 사건이 벌어졌다.
시드니올림픽이 열린 2000년 TV를 통해 강초현(26·갤러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총을 손에 잡았다. 4년 뒤 국내 정상급으로 성장한 이호림은 2004 아테네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어이없는 실수로 올림픽행 티켓을 놓쳤다. 그에게 꿈을 심어줬던 2000년, 그리고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줬던 2004년. 그리고 또 다시 4년이 지나 베이징올림픽이 열린 2008년은 이호림의 계획대로라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화려한 인생의 전성기를 맞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호림은 여자 10m 공기권총 예선에서 380점에 턱걸이하며 21위에 그쳐 8명이 겨루는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25m에서는 17위. 올림픽이 열리는 해마다 인생의 전환점이 펼쳐졌던 ‘올림픽둥이’에게 2008년은 그렇게 ‘좌절의 해’가 되고 말았다.
이호림은 조급해 하지 않을 작정이다. 여자 권총 종목의 세계적인 선수들 중 이호림은 막내나 다름없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라이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천부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4세가 될 2012년 런던에서는 이호림의 ‘금빛 총성’을 기대해 봐도 좋을 듯하다.
핸드볼
정수영(23ㆍ코로사)과 정의경(이상 23ㆍ두산). 이들은 30대 노장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핸드볼 대표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젊은 신무기였다.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 골문을 맹폭하는 멀티플레이어 정수영과 188cm의 큰 키로 골대 정면에서 대포알 같은 점프슛을 터뜨리는 정의경. 대학 선후배 사이(정의경이 1년 선배)로 3년 동안 경희대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이들은 어느덧 남자 대표팀 공격의 핵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 2월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윤경신(35ㆍ두산) 조치효(38ㆍ바링겐) 한경태(33ㆍ오트마) 등 백전 노장들이 모두 빠진 한국이 중동 국가들에게 멋진 설욕전을 펼치며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영건 듀오’의 힘이었다.
그런 정수영과 정의경에게 이번 베이징올림픽은 의미가 남달랐다. 4년 전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정수영은 갑작스런 무릎 부상으로, 정의경은 선배들에게 밀려 막판에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맛봤다. 그러나 이후 와신상담, 한국 핸드볼의 차세대 기수로 성장한 이들은 대표팀의 대들보 역할을 맡으며 당당히 베이징에 입성하게 됐다.
▲ 핸드볼의 정수영(왼쪽)과 농구의 변연하. | ||
그리고 남자팀은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고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경기를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 남자 핸드볼에서도 진정한 ‘우생순’을 연출하고 싶었던 정수영과 정의경. 그러나 그들은 한국 남자 핸드볼의 중흥을 이끌고자 했던 노력도, 메달을 딴 후 유럽 진출을 이루고자 했던 개인적 욕심도, 모두 4년 후로 미루기로 했다.
농구
변연하(28ㆍ천안 국민은행)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렵게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획득한 변연하는 자신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아주는 팀을 원했다.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자신의 플레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그런 팀을 원했다.
모두가 “변연하는 천상 삼성생명 선수지”라고 짐작했다. 오랜 시절 호흡을 맞춰 온 친형제와도 같은 언니들(박정은 이미선)과의 이별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연하는 이적을 택했다. FA 계약 시한 마지막 날, 변연하는 국민은행과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일까, 변연하를 놓친 삼성생명 정덕화 감독은 ‘팀 리빌딩’이라는 미명 아래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변연하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정덕화 감독이 대표팀의 사령탑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죄송했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변연하는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적어도 2승은 하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변연하는 올림픽 6경기에서 평균 14.1점을 넣었다. 3점슛은 54개를 시도해 22개를 적중, 40.7%의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다. 중남미와 동구권의 강호 브라질과 라트비아를 꺾고 A조 4위로 8강에 진출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했다.
8강행을 확정짓고 베이징 시내 한인타운 격인 왕징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던 변연하는 밀려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나 벨로루시전 중 한 경기만 이겼어도 8강에서 미국을 피해서 어떻게 한번 해보는 거였는데”라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을 넘어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 누구보다 부담스러웠을 변연하다. 한국 여자농구의 ‘에이스’로서 올림픽 선전을 통한 여자농구 붐 조성의 책임이 그녀의 두 손에 달려 있었다.
본의 아니게 등을 돌려버린 정덕화 감독과 박정은, 이미선 등에게도 속죄의 활약을 보여줘야 했다.
결론적으로, 변연하는 베이징올림픽에서 매우 잘했다. 여자농구의 8강 진출 성공은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이 얻은 소중한 결과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4년 전 아테네올림픽에서 한국은 12팀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변연하는 베이징올림픽이 폐막하기도 전에 천안시 외딴 산기슭에 자리잡은 국민은행 연수원 내 체육관에서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언젠가 세계 여자농구계의 중심에 다시 우뚝 설 그날을 그리며, 변연하는 오늘도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다.
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