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 vs UAE(아랍에미리트)전에서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가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 준비된 주장, 박지성
박지성이 앞으로 계속 주장 완장을 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남일(31·빗셀 고베)이나 이운재(35·수원 삼성)가 대표팀에 복귀할 경우 둘 중에 한 명이 주장으로 활약할 가능성이 크다.
한시적으로 주장 완장을 찬 것 같은 박지성. 하지만 주장으로 선임된 이후 그는 임시 주장이 아닌 준비된 주장의 모습을 보였다. 대한축구협회 홍보국 이원재 부장은 “지성이는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편이었는데 주장이 된 뒤 달라졌다. 동료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후배들을 챙겨준다. 맨유에서 보고 배운 합리적인 선수단 운영방식을 대표팀에 적용해 보는 것 같다. 한마디로 주장 역할에 대해 준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 부장의 말처럼 박지성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주장이다. 박지성은 대표팀이 소집된 뒤 코칭스태프에게 “대표팀 스케줄을 하루 먼저 선수들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전까지 ‘허정무호’ 대표선수들은 오전 훈련이 끝나고 점심식사 때 오후 일정을 통보받고 오후 훈련 뒤 저녁식사 때 다음날 오전 일정을 들었다. 그러나 박지성은 “하루 먼저 스케줄을 알면 선수들이 스스로 컨디션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그때그때 스케줄을 듣던 기존 선수단 운영방식에 제동을 걸었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맨유 선수단 운영 시스템을 겪어본 박지성의 요청이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지난 13일 오후 훈련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예정됐다는 얘기를 듣자 선수들의 의견을 들은 뒤 “선수들이 서울로 나가는 것보다 파주에 남아 훈련하길 원한다.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도 파주가 낫다”고 허 감독에게 건의해 훈련장소를 파주트레이닝센터로 바꿨다.
# 조용한 리더, 홍명보·유상철
수많은 축구팬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대표팀 주장은 홍명보 전 올림픽대표팀 수석코치와 성인축구팀 지도자 데뷔를 준비하는 유상철이다.
한·일월드컵 때 주장을 맡았던 홍명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 엄청난 존재감을 주는 선수였다. 평소 말수가 적은 홍명보는 주장으로서 말할 일이 생기면 선수 전원을 모아놓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주장이랍시고 쓸데없이 군기 잡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홍명보, 이운재, 김남일, 유상철. | ||
홍명보가 은퇴한 뒤 주장 완장을 이어받았던 유상철도 조용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리더였다. 홍명보처럼 말수가 적었던 유상철은 뭔가 한마디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선수 전원을 모아놓고 말하기보다는 중진급 이상의 선수들만 불러 자신의 뜻을 전해 선수단 전체에 퍼지게 했다.
홍명보와 유상철이 명주장으로 한국축구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던 건 카리스마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배들이 이들을 따랐던 보다 큰 이유는 실력이었다. 홍명보와 같이 뛰었던 선수들은 “설령 우리가 뚫린다 해도 명보 형이 뒤에서 커버 플레이를 해준다는 생각을 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고 옛일을 회상했다. 유상철과 함께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은 “상철이 형은 ‘볼줄(볼의 흐름을 뜻하는 속어)’을 안다. 경기를 읽을 줄 아는 주장이 있다는 건 팀에 큰 도움이다”며 ‘유캡틴’을 믿고 따랐던 시간을 돌아봤다.
허정무호 선수들이 박지성을 주장으로 원한 건 세계최고의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존경할 만한 실력 때문이다. 과거 홍명보와 유상철이 주장 완장을 찼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 든든한 맏형, 이운재
홍명보와 유상철이 은퇴한 뒤 주장 완장을 찬 선수가 이운재였다. 필드 플레이어가 아닌 골키퍼가 주장을 맡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이나 핌 베어벡 감독은 이운재에게 중책을 맡겼다.
하루에 한 마디 정도나 할 것같이 말 수가 적어 보이는 이운재는 선수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형으로 통한다. 물론 주장으로서 나서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평소에는 ‘까불거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친근하게 후배들을 대한다.
이원재 부장은 “이운재는 원정경기를 앞두고 출국할 때마다 선수들을 모아놓고 경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꼭 큰형이 동생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 인상파 주장, 김남일
이원재 부장은 김남일을 ‘제2의 홍명보’라고 묘사한다. 지난 5년간 대표팀 언론담당관으로 태극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곁에서 지켜본 그는 김남일의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홍명보를 빼다 박았다고 말한다.
선수들도 이 부장의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홍명보와 김남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귀띔한다. 살짝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홍명보에 비해 김남일은 ‘진짜 무섭게’ 생겼다는 것이다. 한 선수는 “김남일이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면 정말 가까이 가기가 겁이 날 정도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김남일이 후배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인상파 주장’ 김남일은 공개적인 쓴소리도 마다않는다. 베어벡 감독 시절 “해외파 선수들이 보다 책임감을 갖고 뛰어야 한다”는 한국정서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요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전광열 스포츠칸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