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면서, 보유주식 기준으로 1000억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진 주식 부자가 1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2007년 한때 사상 최다인 178명까지 늘어났던 1000억 원 이상 주식 부자가 증시 여건 악화로 인해 대폭 감소했다는 얘기였다.
반면 경기 악화에도 불구하고 올해 프로야구는 적어도 외형상 ‘파이’가 증가했다. 억대 연봉에 진입한 선수가 사상 최초로 100명을 돌파할 게 유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억대 연봉자 94명 가운데 삼성 심정수와 전병호, 롯데 염종석 등 은퇴 선수가 있지만 새롭게 억대에 진입하는 선수가 훨씬 많은 상황이다.
작년에 신생팀 히어로즈가 첫 시즌을 앞두고 중고참 선수들의 연봉을 무참히 깎았다가 올해 어느 정도 정상 수준으로 회복시켜준 영향도 있다. 게다가 특급 스타는 없지만 ‘고만고만한’ 선수들의 활약으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SK에서 1억 원대 연봉자가 다수 증가한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1억 원 이상 연봉 선수의 증가는 한국프로야구가 ‘직장’으로서 점점 가치를 얻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연봉 1억 원이면 사회통념상 상당한 고액이다. 물론 프로야구 선수가 대부분 35세 전후에서 은퇴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일반 샐러리맨의 연봉에 비해 크게 높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유소년 선수들의 동기 부여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
아직 미국과는 차이가 엄청나다. 메이저리그는 지난해 선수 평균연봉이 293만 달러(약 40억 원)였다. 일본프로야구의 지난해 평균연봉도 3631만 엔(약 5억 6000만 원)이었으니 한국 평균인 7262만 원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에 비해 미국은 평균 55배, 일본은 8배가 많은 셈이다.
본래 한국프로야구 초창기 억대 연봉의 주인공들은 모두 재일교포 선수들이었다. 85년부터 87년까지 장명부 김일융 김기태 등이 그 사례였다.
국내프로야구에서 성장한 ‘토종 선수’ 가운데에선 해태 선동열이 93년 처음으로 1억 원을 넘긴 게 시초였다. 당시 해태는 엄청난 ‘짠돌이 구단’이었다. 오죽했으면 삼성 선동열 감독은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투수 부문 3관왕을 했는데 구단에선 연봉 2000만 원을 올려주겠다고 했던 시절이다. 그런 때가 있었다”면서 웃는다.
그때와 비교하면 요즘 프로야구 선수들은 굉장히 행복한 편이다. 야구만 잘하면 손쉽게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최초 2000만 원짜리 신인 연봉에서 출발해 억대 연봉이 되기까지 2년밖에 안 걸리는 케이스도 등장했다.
SK 왼손 에이스 김광현이 대표적이다. 2007년 데뷔한 김광현은 불과 두시즌을 뛰었을 뿐이다. 지난해 연봉 4000만 원에서 올해엔 9000만 원 오른 1억 3000만 원에 재계약을 마쳤다. 지난해 대비 무려 225%가 급상승한 금액이다. 작년에 다승(16승), 탈삼진(150개) 등 2관왕을 차지하면서 정규시즌 MVP를 따낸 데다 베이징올림픽 일본전에서 맹활약한 덕분에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됐다.
두산 김현수도 단기간에 대박을 터뜨렸다. 2006년 데뷔했지만 그해엔 1경기밖에 뛰지 않았으니 실질적으론 2007년부터 2년간 활약했다. 특히 지난해 타격(0.357), 최다안타(168개), 출루율(0.454) 등 3관왕을 차지했다. 덕분에 작년 4200만 원에서 올해 1억 2600만 원으로 연봉이 200% 올랐다.
데뷔 후 1년 만에 억대 연봉에 올랐던 기록도 있다.
한화 류현진은 2006년에 MVP와 신인왕을 독식한 뒤 2007년 연봉으로 무려 400% 인상된 1억 원을 받았다. 입단 2년차에 억대 연봉에 돌입한 사상 첫 사례였다. 류현진은 올해에도 지난해 1억 8000만 원에서 33% 오른 2억 4000만 원에 재계약을 마쳐 역대 프로야구 4년차 최고연봉 신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기존 4년차 최고 연봉은 삼성 오승환의 2억 2000만 원이었다.
류현진이 만 스물두 살, 김광현과 김현수는 만 스물한 살인 선수들이다. 나이와 기량을 감안했을 때 10년쯤 후면 ‘청년 재벌’ 소리를 들을 만큼 부를 축적할지도 모르겠다.
해외파 출신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몸값이 확 줄었다.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트리플A에서 뛰다 두산으로 이적한 김선우는 올해 연봉이 20% 삭감됐다. 지난해 4억 원을 받았지만 올해엔 3억 2000만 원으로 내려앉았다. 역시 2008년에 첫 선을 보인 KIA 서재응도 기존 5억 원에서 25%, 1억 2500만 원이 줄어든 3억 7500만 원에 사인했다.
해외파 가운데 최악의 삭감액을 기록한 건 KIA 최희섭이다. 2007시즌 중반 한국으로 돌아와 KIA 유니폼을 입은 최희섭은 3년째인 올해 연봉이 2억 원으로 곤두박질했다. 첫해 3억 5000만 원, 작년엔 동결이었는데 올해는 무려 42.9%인 1억 5000만 원이 연봉에서 싹둑 잘려나갔다. 이런저런 부상 때문에 5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타율 2할2푼9리 6홈런 22타점에 그쳤으니 딱히 할 말이 없게 됐다.
무엇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게 뼈아프다. 비록 기량 쇠퇴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한때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맹활약했던 선수들이다. 한국에 와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데다 연봉까지 대폭 깎였으니 올해 명예회복을 위해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그나마 해외파 가운데에선 LG 봉중근이 체면을 살렸다. 2007년 LG에 입단하며 3억 5000만 원을 받았다가 지난해 2억 5000만 원으로 연봉이 28.6% 삭감됐던 봉중근은 올해엔 3억 6000만 원으로 복귀했다. 봉중근은 지난해 11승8패, 방어율 2.66을 기록했는데 LG 마운드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장진구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