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전지훈련장에 도착한 WBC 대표팀. 연합뉴스 | ||
#김병현과 20㎏의 한계
“어이, 저기 좀 봐, 김병현 말이야.”
지난 1월 8일 호텔신라에서 대표팀 유니폼 발표회를 겸한 출정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28명의 선수 소개 때 김병현은 14번째로 등장했는데 1년간 운동을 쉰 티가 몸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이를 본 한 야구인은 “엄청나게 살이 불었다. 진짜 1년간 운동을 쉰 게 맞구먼”이라고 언급했다.
이때 현장에 있었던 대표팀의 한 코치는 “직·간접적으로 들었는데 병현이 몸무게가 한창 때보다 20㎏쯤 늘었다고 했다. 단기간에 투수로서의 몸을 다시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김인식 감독의 김병현에 대한 애정은 분명했다. 3년 전 제1회 WBC 때 김병현이 불펜에서 훌륭한 역할을 해줬고 이번에 박찬호도 출전하지 않는 마당에 김병현만 한 경험을 가진 선수는 없다. 따라서 어떻게든 실질 전력으로 안고 가려는 게 김 감독의 목표였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얼마 전 무참히 깨졌다.
#김인식 감독 ‘언중유골’
지난 2월 16일 하와이에 한국 취재진이 잔뜩 도착했다. 김인식 감독은 취재진을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병현을 최종엔트리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간 연락이 잘 안됐는데 어제 전화 와서 발목을 다쳤고 여권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했다. 도통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상 촉박해 엔트리 제외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김병현은 이날 일부 열혈팬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야구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날 밤 김병현은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여권을 되찾았다. WBC에 가고 싶다”고 읍소했다. 하지만 이튿날 김인식 감독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엔트리 변경은 없다. 병현이가 모든 세상사에 있어 보다 적극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인식 감독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 속에는 김병현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배어나왔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의 주인공이 된 김병현을 대표팀에 합류시켜봤자 팀워크만 해칠 것이라는 판단도 당연히 작용했다.
대표팀의 아무개 코치는 “김병현이 불어난 몸을 추스르는 데 실패하고 페이스가 올라오지 않으니까 본인도 갈팡질팡한 것 아니겠나. 결국 여권 분실이란 건 극히 부분적인 얘기고 대표팀에 와서 던질 수 있는 상태가 못됐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일각에서는 여권 사건 이후 김병현에 대한 김인식 감독의 몇몇 조언들이 김 감독의 사람 대하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실은 반대로 대로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김 감독은 어지간해선 선수 기량 외에 성품 등에 대해선 공개적인 자리에서 논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엽과의 신경전
앞서 지난해 11월, 요미우리 이승엽은 김포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소속팀에 충실하기 위해 더 이상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승엽으로선 일찌감치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다.
그런데 이후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김인식 감독은 시종일관 이승엽이 당연히 대표팀에 합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후 이승엽은 김 감독을 직접 만나고, 전화상으로도 대표팀 불참 의사를 전달했다.
김 감독은 이번엔 “아시아 예선만이라도 이승엽이 뛰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흘렸다. 그래도 이승엽이 꿈쩍하지 않자 “엔트리 숫자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괜찮다. 이승엽이 대만전 한 경기만이라도 뛰고 갔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가만히 보면 지난해 11월 이미 결론 났던 문제를 놓고, 이승엽과 김인식 감독은 3개월 동안 본의 아니게 은근히 ‘신경전’을 편 셈이다. 결국 이승엽은 1월 말 대구 세진헬스에서 가진 인터뷰 때 “대표팀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소속팀 요미우리를 위해 전념하겠다”고 최종적으로 못을 박았다. 결국 1월 말쯤 되자 대표팀에선 ‘이승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야구계 어른인 김인식 감독이 다소 굽히는 듯한 뉘앙스까지 풍겨가며 이승엽에게 태극마크를 달아 주려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자신이 이끌었던 제1회 WBC 때 이승엽은 5홈런을 터뜨리며 전 세계 홈런왕이 됐다. 그가 있는 타선과 없는 타선은 무게감이 다르다. 김인식 감독에게 이승엽의 불참은 분명 재앙이다.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
비단 이승엽만이 아니다. 대표팀의 무게중심을 잡아줄 수 있었던 필라델피아 박찬호는 다소 뜬금없이 비칠 수 있는 ‘눈물 해프닝’까지 보이며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김인식 감독에겐 박찬호 역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이밖에도 2000년대 들어 대표팀의 4번타자를 도맡았던 두산 김동주도 대표팀 전력에서 이탈했다. 최고 유격수인 삼성 박진만은 어깨 부상이 낫지 않아 WBC 직전까지 참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 감독 입장에선 2006년 1회 때와 비교하면 전력이 반도 못 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대표팀이 처음 구성될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 당초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지만 SK 김성근 감독이 고사했다.
하지만 이번 WBC 대표팀 성적이 나쁠 거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어떤 면에선 자연스럽게 대표팀 세대교체가 이뤄진 부분이 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기존 대표팀 차출 선수들의 내부 결속이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김광현 류현진 강민호 김현수 등 젊은 선수들의 의욕이 철철 넘쳐흐른다. 무엇보다 비록 목소리에 짜증이 늘고는 있지만 항상 전력 이상의 플러스알파를 창출해낸 김인식 감독이 버티고 있으니 기대된다.
장진구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