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 황제’ 조훈현 9단이 BC카드배 챔피언십에서 착수에 고심하고 있다. | ||
요즘은 중요 프로대국은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된다. 세상이 진짜 좋아지긴 좋아졌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의 대국실이나 대화창은 예전 증권회사의 객장을 방불케 한다. 바둑계의 온갖 정보와 의견, 통계 숫자들이 넘치도록 흘러 다닌다.
프로 고수들의 공식 대국이 중계되면 바둑 누리꾼들은 사이버 머니를 갖고 베팅을 한다. 가령 ‘조훈현 9단이 이긴다’에 1만 점, ‘윤준상 7단이 이긴다’에 3만 점을 거는 식이다.
사이버 머니니 쓸 수는 없는 돈. 그런데도 바둑 누리꾼들은 열심히 진지하게 베팅을 하고 대국 진행에 따라 일희일비한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베팅 상황판을 보면 아, 사람들이 누가 더 세다고 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지난 2일 조-윤의 대국 때는 윤 7단 쪽에 머니가 많이 실렸다. 따라서 배당은 조 9단 쪽이 높아 열세였지만 결과는 조 9단의 승리였다.
조 9단의 8강 진출은 유일한 50대 투사, 돌아온 황제, 백발 휘날리며 8강 안착 등의 제목과 함께 바둑 뉴스의 지면을 크게 장식했다. 조 9단은 쉰여섯, 윤 7단은 스물둘. 조 9단은 지는 태양, 윤 7단은 혈기방장한 신진 강호. 재작년에 국수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던 차세대 대표 주자의 한 사람. 뉴스라면 뉴스였다.
그러나 조금은 민망한 웃음도 나온다. 생각이 교차한다. 쉰여섯이면 노년인가. 요즘은 한창 나이 아닌가. 10여 년 전에 소설가 최인훈 씨가 모처럼 <화두>라는 장편을 발표했을 때 어떤 평자가 “장엄한 황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년 전 대통령 선거철에 정치부 기자가 김종필 자민련 총재에게 “승산이 있겠느냐? 승산이 없다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는 요지의 질문을 던졌을 때 김 총재는 “서녘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황혼”이라는 말로 대답했다.
조 9단도 그런 장엄한 황혼인 것인가. 아닌 것 같다. 아직은 이른 것 같다. 그냥 오후 정도 아닐까. 그러나 바둑은 승부의 세계니까 이런 특별한 동네에서는 나이 쉰여섯이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젊은이들이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노장으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대단한 거네. 더구나 승부의 일선에서 아들뻘도 안 되는 젊은이들과 맞대결을 벌여 만만찮은 성적을 거두는 50대는 조 9단이 유일하니까.그러나 이런 생각도 든다. 조훈현 9단은 그냥 9단이 아니라 황제였다.
한때, 한때가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 천하를 발 밑에 두었던 그야말로 강호제일검이었다. 그 황제가, 그 제일검이 신진강호를 가끔 꺾는다고 그게 과연 뉴스인 것인지. 우승도 아니고 8강인데, 그걸 뉴스로 화제에 올리는 건 오히려 황제에 대한, 제일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아닌지.
조 9단과 비슷한 연배의 바둑팬들은 조 9단이 이기면 정말 반갑고 기쁘다. 그렇지. 세상일이란 연조가 있는 법이야. 경륜과 철학이 있어야지. 기술만 갖고 되나. 나이를 우습게보면 안 되지. 그러나 지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이 지는 걸 볼 때마다 더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조치훈 9단이나 서봉수 9단이 지는 것을 볼 때와는 또 다르다. 조훈현은 우리 젊은 날의 우상이었는데, 그 우상은 세월이 가도 여전히 우상으로 남아 주기를 바랐는데, 우리의 우상도 우리처럼 세월과 함께 시나브로 스러져가는구나. 황제가 쓰러지는 모습, 제일검이 무릎을 꿇는 모습. 적막감이다.
어느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바둑판 위에서 투혼을 불사르다가 소진되었다고 느껴질 때 내려가는 것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미 보여 줄 것은 충분히 보여 주었으므로, 이쯤 해서 방향 전환을 해 보는 것이 좋은 건지.
바둑계에도 승부 말고도 할 일은 많다. 바둑계의 큰 숙제, 큰 매듭 하나를 푸는 일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지. 조훈현이란 이름이 갖는 가치, 파괴력, 전파력 등을 승부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너무 아까운 노릇이다.
많은 ‘평범한’ 타이틀 홀더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황제였으니까. 평생에 타이틀을 하나라도 가져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타이틀을 한 번이라도 차지했던 것을 ‘평범’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조훈현이란 이름 앞에는 그런 것들은 그저 평범할 뿐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