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호 9단(왼쪽)이 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박문요 5단을 불계승으로 이기며 구리 9단을 꺾은 콩지에 9단과 결승에서 맞붙게 됐다. | ||
이9단은 LG배에서 창설 첫 해를 비롯해 제3, 5, 8회 등 통산 4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두 판 모두 어려운 승부였다. 치우쥔 8단과 박문요 5단은 이창호 9단과 비슷한 기풍. 치우쥔 8단은 며칠 전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에서 만나 이창호 9단이 1승2패로 당한 상대이고, 박문요 5단도 이창호 9단이 별로 재미를 못 본 상대여서 예전 같지 않은 이창호 9단이 과연 두 사람을 다 물리칠 것인지, 우려가 없지 않았다.
치우쥔 8단과의 바둑은 끝까지 미세했다. 이창호 9단이 앞서고 있기는 했지만, 막판에 치우쥔 8단이 헛수를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끝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박문요 5단과의 대국도 거의 똑같은 양상. 아니, 치우쥔 8단과의 바둑보다 더 피 말리는 끝내기 바둑이었다. 거의 다 둔 상항에서 박문요 5단이 돌을 거두어 이창호 9단이 불계승을 거두었으나 계가를 했다면 1집반이나 반집 승부였던 것.
격세지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9단의 상대가 누구든 중반 넘어 미세하게 흘러가는 양상이라면 마음을 놓았었고, 상대가 치우쥔 8단이나 박문요 5단 정도면 대국 자체에 큰 관심들을 갖지 않았을 텐데, 요즘은 그게 아니다. 치우쥔이나 박문요가 약한 것이 아니라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다. 중국의 ‘독식’을 막은 이 9단의 값진 승리로 평가된다.
올해 초 도요타-덴소배에서 우승하면서 일약 세계 타이틀 홀더 반열에 오르며 중국 랭킹 6위로 도약한 박문요 5단은 이번 이창호 9단과의 대결에서 이길 경우 결승에 진출, 준우승을 확보함과 동시에 중국 30번째 9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으나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중국기원에는 ‘세계대회 2회 준우승이면 9단 승단’이라는 규정이 있다.
그나저나 최철한 9단과 박영훈 9단을 연파한 콩지에 9단의 기세가 무섭다. 일주일 간격으로 삼성화재배와 LG배, 굴지의 세계대회 두 곳에서 결승에 올라 세계대회 5관왕 구리 9단을 턱 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더구나 구리 9단이 요 몇 달 사이 좀 느슨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콩지에 9단이 현재의 가파른 상승세를 유지한다면 조만간 구리 9단을 추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콩지에 9단은 지금 세계 1위와 중국 1위,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최철한 9단과 박영훈 9단의 패배는 허망했다. 최 9단은 콩지에 9단의 초반 대모양 작전을 견제하지 않다가 콩지에 9단이 대세력의 울타리를 친 후에야 단기돌입해 좌충우돌했으나 콩지에 9단의 노련한 반면운영에 밀리며 끝내 대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최근 한국 랭킹 1위로 뛰어오른 최 9단이었기에 팬들의 실망이 컸다.
팬들을 실망시킨 것은 박영훈 9단도 마찬가지. 박 9단은 콩지에 9단과의 통산 전적 5전 5패. 이번에는 심기일전의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으나 결과는 대마 함몰. 6전 6패의 수모였다. 중반의 난전에서 콩지에 9단이 대규모 사석작전을 펼치며 박 9단의 대마를 완벽하게 침몰시키는 장면을 지켜본 누리꾼들은 콩지에 9단에 대해 “비록 적이지만 너무 멋졌다. 한여름의 폭풍을 보는 것 같았다”는 말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창호가 거센 중국 파도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번에 졌으면 결승에는 콩지에와 박문요가 올라가 중국의 세계대회 여섯 번째 형제대결이 이루어질 뻔했다. 이창호 댐을 바라보는 팬들은 조마조마하다. 수위가 시시각각 높아지고 있다. 범람은 시간문제 같기도 하다.
이 와중에 국내에서는 2001년에 입단한 후 큰 소문 없이 성장하다가 2006년 제3기 전자랜드배 청룡부 우승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스물두 살의 청년 홍성지 7단이 얼마 전부터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치고 있다. 지난해에는 제3기 물가정보배 결승3번기에서 이세돌 9단과 겨루어 2승1패, ‘이세돌을 꺾고’ 타이틀을 차지한 청년으로 한동안 화제의 주인공이 되더니 올해는 또 국내 최고 기전인 제37기 하이원배 명인전에서 준결승 3번기에 진출, 현재 원성진 9단과 1승1패, 접전을 벌이고 있다.
기전에 임하는 전략이 참신하다. 요컨대 ‘선택과 집중’이다. 작년에는 물가정보배, 올해는 하이원배, 이런 식으로 한 시즌 한 기전에 올인하는 것. 이거 말 되는 거 아닌가. 바둑 내용도 아주 독창적이며 이세돌을 방불케 하는 과감-자유분방-현란함이 있다는 평. 지켜보자. 이창호를 도와 한국 바둑의 수문을 지킬 사람은 홍성지일지도 모르겠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