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광주 상무지구에서 기자와 만난 서재응은 저녁 식사를 위해 자신의 단골 고깃집에 자리를 마련했다. 워낙 입담이 좋기로 소문난 서재응답게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남다르다. “이모, 여기서 제일 안 팔리는 소주가 뭐예요? 그걸로 주세요” “이모, 제가 한국 나이로 서른셋인데, 동안이죠? (아줌마가 서른세 살로 안 보인다고 하자) 그런데 애가 셋이에요. 아시죠? 저? 광주의 ‘정자왕’ 하하” “근데, 이모! 애 셋 낳으면 한 달에 10만 원씩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구청에서 편지가 왔어요. 재정난으로 당분간 지급이 중지된다고” 이런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지난 5월에 셋째 아들을 낳자, KIA의 절친인 김상훈이 서재응에게 ‘정자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KIA에서 아이 셋을 둔 선수는 서재응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야구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해본 한국시리즈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발도 아닌 중간계투로 잠깐 모습을 드러낸 것 빼곤 거의 벤치만 달궜다. 그래서 ‘응원단장’이란 별명까지 붙었는데, 당시 어떤 기분이었나.
▲7차전에서 우승이 확정되고 선수들이 모두 뛰어나가 울었잖아요. 저도 울컥 하는 심정이었어요. 막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순간, ‘과연 내가 한국시리즈동안 뭘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응원한 것 빼놓고는…(웃음). 참자, 참았다가 내년에 서재응이란 이름을 되찾은 다음에 울자, 그렇게 마음먹었어요. 그런 거 아세요? 너무 기쁜데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을. 제가 딱 그 꼴이었죠 뭐.
―한국시리즈 3차전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만 같다. 그때 선발이었던 구톰슨이 홈런을 맞자 바로 투입이 됐는데 몸 상태가 안 좋았었나?
▲그게 아니라 3차전 전부터 팔이 안 좋았어요.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거든요. 그래도 진통제를 먹으면서 팀의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3차전 때 구톰슨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아, 빨리 몸을 만들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몸 풀 틈도 없이 투수가 교체됐고 엉겁결에 마운드에 올라가게 된 거예요. 처음엔 컨디션이 좋았어요. 공 스피드가 150km까지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점점 구위가 떨어졌죠. (김)상훈이가 느꼈대요. 제 몸이 안 좋다는 걸. 공이 형편없었거든요. 사람들은 SK 정근우랑 신경전 벌이다가 컨디션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그 전부터 어깨 통증으로 공을 제대로 던질 수가 없었어요.
―한 번 제대로 얘기해보자. 정근우와 시비가 붙으면서 결국 벤치클리어링 사태가 벌어졌다. 정근우한테 욕하는 장면이 TV로 잡히기도 했는데, 단순히 그 일 말고도 이전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가.
▲9월 8일 SK전에 선발로 나갔다가 정근우한테 몸에 맞는 볼이 갔어요. 그런데 맹세코 고의로 맞힌 게 아니었어요. 상훈이가 몸쪽 공을 원해서 좀 더 붙여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던진 게 빠진 거였죠. 사실 그 경기는 팀이나 개인적으로나 아주 중요한 게임이었어요. 빈볼 하나로 리듬을 깨는 바보스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공이 빠졌고 근우가 맞는 걸 보면서 제 자신한테 확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근우가 서서 째려보고 있는 거예요. 저도 순간 열을 받아서 근우한테 다가가며 뭐라고 하니까 근우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대들더라고요. 성질이 나서 근우한테 욕을 했죠. 그러다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만난 거예요. 이번엔 근우가 친 공이 저한테 오기에 그걸 잡아서 던지려다가 근우가 천천히 걸어가는 게 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천천히 공을 던진 것이죠. 그런데 또 째려보더라고요. 결국 제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고 양팀 벤치에서 선수들이 다 뛰어나오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9월에 데드볼이 나왔을 때 정근우한테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나.
▲만약 실수로 몸에 맞는 공이 나왔을 땐 대부분 타자한테 다가가서 미안하다고 말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SK 선수들한테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마도 SK한테는 지기 싫다는 생각 때문일 거예요. 그러다보니 빈볼이 나와도 쉽게 미안하다는 말이 안 나와요.
―유난히 이번 한국시리즈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모든 시리즈가 끝난 지금까지 말이다.
▲두산이 SK랑 플레이오프를 끝내자마자 바로 선수들한테 전화가 왔어요. 조심하라고, SK 선수들이 껌 씹기 시작한다고요. 진짜 희한한 게 1차전에선 껌을 안 씹었는데, 2차전부터 껌을 씹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도 대책을 세웠죠. 하지만 1년 내내 사용한 사인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가 쉽지 않잖아요. 일단 해보고 노출된 것 같으면 바로 바꾸자고 했어요. 7차전 때 선수들한테 어떤 주문을 했는지 아세요? 주자가 1루로 나가게 되면 상대 피처가 신경쓰게끔 고개도 흔들고 마구 움직이라고 요구했어요. 우리가 사인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행동하면 상대 선수들도 신경을 쓰게 될 것이고 흐름이 깨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막상 1루로 나간 우리 선수들이 긴장을 해서인지, 주문한 대로 움직이질 못하더라고요.
▲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저도 한국 와서 처음 알았어요. 그런 게 있다는 걸. 전 사인은 안 가르쳐줘요. 그러나 이미 승부가 기울어졌을 때는 친한 타자가 나오면 직구만 던집니다. 치긴 치되 홈런만 치지 말라고 하면서요. 아마 이런 게 한국의 정 문화 때문인 것 같아요. 미국은 아무리 친해도 냉정하거든요. 한국보다 훨씬 더 살벌하고 치열해요. 선수들과의 관계가.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이 한국에서 야구하는데 때론 족쇄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더욱이 두 시즌 동안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팬들의 비난도 큰 부담이 됐을 텐데.
▲전 KIA 홈페이지 ‘호랑이사랑방’에는 한 번도 안 들어갔어요. 성적이 안 좋을 땐 신문 기사도 안 봐요. 제 카페에 들어가서 응원 글만 챙겨 읽죠. 거기엔 절 비난하는 글은 없잖아요. 어떤 기사를 봐도 리플은 절대 안 봐요. 댓글이 몇 개 달렸나만 확인하고 나와요. 선수들이 팬들의 리플에 상처받는 걸 보면서 이해가 안 됐어요. 비난이 많을 것 같으면 아예 안 보면 되잖아요.
―KIA에 두 명의 용병이 있었다. 구톰슨과 로페즈. 다른 선수들보다 서재응과는 남다른 친분을 유지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두 선수들이랑 별로 안 친했어요. 걔네들이 영어로 뭘 물어보면 바로 통역 불렀어요. 뭐랄까…, 미국에서 야구하며 선수들한테 괄시도 많이 받았고 여러 가지로 당한 게 많아요. 그런 앙금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용병들한테 친근감을 못 가지겠더라고요. 그래도 로페즈는 팀을 위해 헌신을 다했어요. 된 사람이에요. 하지만 구톰슨은 자기만 생각해요. 자기가 안 던지는 날엔 게임도 다 안 봐요. 로페즈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서재응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소에 FA 신청 후 마음고생이 심한 장성호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김상훈과 함께 KIA의 절친 동기들이다. 전날 구단과 5분 미팅 후 충격에 빠졌었다는 장성호는 결국 KIA와 제대로 된 협상을 하지 못했다. 장성호와는 서재응과 인터뷰 후 따로 얘기를 나누기로 하고 질문을 이어갔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미디어와 그리 살가운 관계가 아니다. 인터뷰도 자주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왜 그런가.
▲뉴욕 메츠에 있을 때 한국 복귀 관련 기사가 나왔어요. 완전 사실과 다른 내용이었죠. 저한테 확인도 안 하고 쓴 기사였어요. 한국 나왔을 때 그 기사를 쓴 기자와 대판 싸웠어요. 그 후론 인터뷰가 싫어졌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많이 솔직하잖아요. 성격도 감추지 못하고요. 그런데 그게 잘 걸러지지 않은 채 기사화되면 저한테 치명타예요.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인터뷰를 피하는 편인데, 그러다보니까 싸가지가 있네 없네 하고 말들도 많더라고요.
―미국에서 야구할 때, 유독 한국에 귀국하는 시간이 새벽 5시 전후였다. 해마다 공항에 나가면서도 ‘이 사람은 왜 이 시간에만 들어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들이 그 시간에 몇 명이나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그랬어요(웃음). 2003년에 9승12패하고 귀국했어요. 공항이 난리가 났더라고요. 그때도 새벽 5시쯤 됐을 거야. 2004년 쫄딱 망해서 들어갔어요. 기자가 3명이나 나왔나? 2005년에 8승2패에 방어율 2.59로 최고의 성적을 올렸죠. 또 기자들 엄청 몰렸어요. 제가 새벽 4시쯤 도착했을 때 기억나세요? 그때도 나오셨죠? 진짜 황당했던 게 비행기가 뒷바람이 불어 1시간이나 빨리 도착한 거예요. 더욱이 비행기 기장이 원래 밟는 스타일이래. 세게 밟는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빨리 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기자들 3명밖에 없었고, 공항, 엄청 썰렁했었죠. 이번에 추신수 들어오는 거 보면서 이전 제 모습이 생각났어요. 신수는 잘 할 거예요. 미국에서 만났을 때 많은 얘기를 나눠봤는데, 다른 선수들이랑 달라요. 정말 야구를 사랑하더라고요. 저완 완전 딴판이죠. 생활 자체가 ‘범생이’예요. 야구밖에 몰라요.
서재응은 한국 FA 제도의 폐해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KIA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주가를 날리던 장성호의 ‘오늘’을 보면서, 한국 FA는 선수들을 위한 FA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야구 잘 하는 선수가 아니면 FA 자격이 돼도 감히 FA를 신청할 꿈도 꾸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당분간 장성호와 함께 무등산을 오르내리며 심신을 다스리겠다는 서재응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성호에게 술을 권하며 ‘마음을 비우라’고 조언해준다.
광주=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