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6년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을 상대로 치수고치기대회가 펼쳐졌다. | ||
성사까지는 만만치 않은 고비가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한·중은 물론 세계 바둑팬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기대하고 있는 이벤트여서 머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벤트가 폭발력을 가지려면 대국 수를 늘이고 상금도 올려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얼마 전부터 얘기가 나오고 있는 바대로 상금 10억 원 정도의 ‘치수고치기 10번기’로 하자는 것. 네 사람 모두 이미 세계 타이틀을 차지했던 사람들이니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만으로는 자극이 약하고, 짜릿하고 드라마틱한 승부가 되려면 치수고치기 같은 시한폭탄을 장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치수고치기 10번기에 대해선 지난번에 우칭위엔의 10번기를 소개한 바 있거니와 우리나라에서도 그 비슷한 이벤트가 있었다. 1985년 한국기원의 <월간 바둑>이 기획하고, 그 시절 궁중명과 제조회사로 유명했던 ‘호원당(대표 정운희)’이 후원했던 ‘조훈현 대 도전5강 치수고치기 10번기’였다.
당시 조 9단은 1980, 82, 84년 세 차례나 전관왕에 오르면서 한국 바둑을 천하통일해 더 이상의 적수가 없던 상태였다. 유일한 추격자 서봉수 9단은 지쳐 있었고, 유창혁은 입단 2년차의 신병이었으며, 이창호는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입단 후보 영순위의 연구생이었다.
도전5강은 조-서 다음으로 성적을 내고 있던 장수영 백성호 김수장 강훈 서능욱 등의 다섯 사람이었다. 타이틀은 조훈현, 도전권은 서봉수가 독식하던 시기에 이들 다섯 사람은 가끔 서봉수를 제치고 도전자가 되어 조훈현과 타이틀을 다투었다. 조훈현의 타이틀을 끝내 빼앗지는 못했지만, 조-서 드라마에 조금씩 식상해 하던 팬들은 이들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
출발은 도전5강의 정선. 도전5강이 흑을 들고 덤을 내지 않는 바둑이었다. 맞바둑이 아니었으니 넓은 의미의 접바둑이었다. 지는 쪽은 대국료가 없었고, 한 쪽이 2연승하면 치수가 고치는 방식이었다. 치수나 대국료가 모두 프로의 자존심을 정면에서 찌르는 조건이었지만, 양쪽은 모두 동의했다. 어느 쪽이든 2연승이면 치수가 고쳐졌다. <월간바둑>은 이 이벤트에 ‘위험대결85’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주자는 강훈. 강훈은 ‘진땀’이라는 별명답게 끈질기게 버티고 버텨 1집을 이겼다. 조훈현은 프로기사가 된 이후 처음으로 대국료 없는 바둑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굉장한 수모였을 텐데, 조훈현의 태도는 싹싹했다.
강훈의 인기가 치솟았다. 당시 바둑팬들 중에는 “도전5강이라는 타이틀은 멋지지만 서봉수보다 아래일 것이고, 서봉수는 조훈현보다 아래이니 도전5강은 조훈현에게 정선이 아니라 2점으로도 벅찰 것”이라고 짐작하던 사람도 많았는데, 정선으로 이기는 걸 보여 주었으니까.
▲ 제10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우승 주역 이창호 9단(왼쪽)과 이세돌 9단. | ||
재미를 본 <월간바둑>은 이듬해 위험대결의 후속타로 ‘탐험대결86’을 기획했다. 탐험의 대상은 역시 조훈현이었고 탐험대로 선발된 사람은 도전5강에 필적하는 성적을 내기 시작하던 조대현 양재호, 그리고 유창혁이었다. 방식은 같았다. 정선으로 시작해 2연승이면 치수를 고치는 것. 세 사람이 세 판씩 아홉 판을 두었다. 여기서 입단 3년차의 유창혁은 세 판을 정선으로 모두 이겨 기대에 부응했고, 그로부터 2년 후 조훈현으로부터 <대구매일신문>의 ‘대왕’ 타이틀을 쟁취, 서봉수 말고 철옹성 조훈현 왕국에 흠집을 낸 최초의 신예로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세대교체의 신호탄이었다.
한국 최초의 치수고치기는 1956년 <연합신문>이 일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우칭위엔의 치수고치기에서 힌트를 얻어 기획한 ‘조남철 대 김봉선, 김명환의 대결’이었다. 김봉선과 김명환은 당시의 2인자 그룹이었다. 결과는 물론 조남철의 압승이었다.
우칭위엔 10번기 이후 일본에서는 1983년 조치훈이 ‘기성’ ‘명인’ ‘본인방’ 등 빅3 기전을 동시 장악하는 것으로 일본 바둑을 천하통일한 후 고바야시 사토루, 야미시로 히로시, 왕리청 등 떠오르던 일본 신예 3명을 상대로 치수고치기를 벌여 그들을 2점으로 몰아붙인 일이 있다.
치수고치기, 지난 세기 초반과 80년대 중반에 한바탕 회오리를 몰고 왔던 이게 다시금 새로운 흥행의 돌파구로 떠오르고 있다. 바둑은 어차피 일 대 일 승부이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도 한-중-일의 단체 연승전 같은 게 있지만 이것도 점차 자극이 적어지는 느낌이다. 각 나라에서 10명이나 20명이 나와 각 일 대 일로 동시에 열 판이나 스무 판을 두어 승부를 가리는 단체전에서 발전한 것이 이른바 연승전인데, 계속 그걸로만 하다 보니 어느 한 사람이 5연승, 6연승을 올리는 경우 스타 탄생을 구경하는 재미가 크긴 하지만, 반대로 한두 사람만 빛이 나는 단점도 드러나고 있는 것.
그래서 이것도 원래의 단체전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열 명, 스무 명, 아니면 삼사십 명이 나와 동시에 승부하는 모습도 장관일 터이고, 그게 국제대회에서 약세를 보이는 일본에게 숨통을 열어 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니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