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남아공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은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함께 B조에 편성됐다. 로이터/뉴시스 | ||
독일월드컵에서 토고를 꺾고 월드컵 원정 첫 승을 거둔 한국은 이번 대회 목표를 16강 진출로 잡았다. 한국이 16강에 오르려면 1승1무1패로는 불안하고 1승2무는 거둬야 안정권이다. 16강의 관건은 첫 경기 그리스전이다. 그리스는 그나마 한국으로서는 가장 해볼 만한 상대다. 그리스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1994년 미국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두 번째다. 그리스 또한 최약체로 꼽히는 한국을 첫 승 제물로 노리고 있다. 1차전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상황은 한국과 그리스 모두 똑같아 빡빡한 승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는 ‘선수비 후역습’을 하는 팀이다. 한국으로서는 조별리그 3경기 중 유일하게 주도권을 많이 빼앗기지 않고 우리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경기가 될 것 같다. 한국은 그리스의 빠르고 정확한 역습을 교묘한 파울로 끊는 한편 촘촘한 그리스 수비벽을 뚫을 수 있는 창도 함께 갈아야 한다.
그리스 감독은 이번 월드컵 최고령 사령탑인 오토 레하겔(71·독일)이다. 벌써 그리스를 맡은 지 9년이 됐고 그 사이 그리스는 200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04) 정상에 올라 변방에서 중심으로 탈바꿈했다. 김호 전 대전 감독은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보다 그리스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더 강한 상대가 될 수 있다”면서 “9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면서 선수들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는 레하겔은 칼을 숨긴 사람”이라고 경계했다.
두 번째 상대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설명이 불필요한 세계적인 강호다. 1978년, 1986년 두 차례 월드컵 정상에 올랐고 준우승도 두 번이나 했다. 아르헨티나가 ‘초보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의 ‘실정’ 때문에 남미예선 4위로 가까스로 본선행에 턱걸이했지만 본선에서도 부진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한다.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워낙 좋은 데다 월드컵 최종 스쿼드가 정해지면 마라도나의 어설픈 실험에 대한 논란이 없어지면서 24년 만에 정상을 탈환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될 게 분명하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비겨도 대성공이다. 그런데 전력이 밀리는 데다 일정조차 한국에 불리해 걱정이다. 아르헨티나는 1차전 나이지리아, 2차전 한국전을 같은 경기장에서 치른다. 그곳은 한라산과 비슷한 해발 1753m 고지에 있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이다. 반면 한국이 1차전을 치를 경기장은 해발 0m에 위치한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이다. 아르헨티나는 1차적으로 고지적응을 마친 뒤 한국을 맞지만 한국은 첫 번째 고지 경기를 그것도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와 치러야 한다.
고지에서는 산소량 부족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지난 6월 남아공에서 열린 2009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남아공은 선전했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는 부진한 데도 고지 적응 실패가 한몫했다. 또 고지에서는 기압이 낮아 공의 속도도 빨라진다. 요하네스버그에서는 골대 앞 20m 지점에서 찬 공이 해안가 더반에서 찼을 때보다 5%나 빠른 시간에 골라인을 통과했다. 해안가에서는 시속 120km짜리 공이 고지대에서는 126km로 변한다. 골키퍼들의 집중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은 내년 1월 요하네스버그에서 120km 떨어진 루스텐버그로 가서 현지 적응훈련을 하고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도 같은 장소에 최종 베이스캠프를 차린다. 루스텐버그는 해발 1250m에 위치해 있어 고지 적응 훈련을 하는 데 좋다.
마지막 상대인 나이지리아도 그리스, 아르헨티나처럼 지역예선을 힘겹게 통과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지역예선 B조에서 마지막 1경기를 남겨 놓고 선두 튀니지에 승점 2가 뒤졌다. 최종전에서 케냐를 꺾은 나이지리아는 탈락이 이미 확정된 모잠비크가 튀니지를 잡아준 덕분에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아프리카 국가 중 체력이 가장 좋은 팀으로 평가받는 나이지리아는 전통적으로 월드컵 본선에서 강했다. 앞선 3차례 월드컵에서 16강에 두 번(94년, 98년)이나 들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은 잉글랜드, 스웨덴, 아르헨티나가 버틴 죽음의 조에 속한 탓이었다.
나이지리아전 승부는 우리보다는 나이지리아 상황이 중요하다. 아프리카 팀들은 목표의식을 잃을 경우 후반부 경기를 망치는 경향이 짙다. 만일 나이지리아가 앞서 아르헨티나, 그리스에서 패하면서 16강 진출이 조기 무산된다면 한국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무척 유리해질 수 있다. 반대로 나이지리아도 한국을 꺾을 경우 16강 진출의 가능성이 있다면 ‘슈퍼 이글스’라는 별명답게 한국에 맹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강한 상대와 싸우기 위해서는 일단 든든한 수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도 “세계대회에서는 첫 골을 내주면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비의 생명은 조직력이다. 고정된 멤버가 반복훈련을 많이 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16강에 오르려면 골을 넣어야만 한다. 약팀이 강한 상대와 맞서 골을 넣으려면 정확한 세트피스와 빠르고 깔끔한 역습이 필요하다.
김학범 전 성남 감독은 “우리가 이긴다고 자신할 팀이 없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최강 프랑스와는 비기고 오히려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스위스에 0-2로 지지 않았나”라며 “모두 은근히, 소리 없이 강한 팀들이라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한국을 이끈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는 한국에 너무 강한 상대”라면서 “이 두 팀이 비록 대륙 예선에서 고전했지만 좋은 선수들이 많아 조 1, 2위를 다툴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세훈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