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7일 우리캐피탈과 대한항공의 경기를 비디오 판독관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각 팀의 감독이 요청하면 3명이 한 대의 모니터로 긴박한 순간을 ‘리플레이’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프로배구 경기 중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습니다”는 진행자의 멘트에 한창 달아오르던 코트가 순식간에 ‘일시정지’ 상태가 될 때가 종종 있다. 팀 별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 때문에 감독들은 승패가 엇갈릴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지 않는다. 판독에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0초. 2시간가량 진행되는 경기 시간에 견주어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1점 차이로 승부가 갈릴 수도 있는 클라이맥스이기에 감독이 요청하는 비디오 판독 때는 관객부터 선수들까지 모두가 마른침만 꿀꺽 삼킬 뿐이다.
모두가 일시정지된 순간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판독 위원은 한 경기 당 세 명. 경기장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자신들에게 쏠리는 까닭에 되도록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정해지려 노력하지만, 사실 판정에 대한 엇갈린 의견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일치된 판독과 정확한 판정을 내리는 일이 쉽지 않은 데는 턱없이 떨어지는 장비의 문제가 가장 크다는 게 판독위원들의 전언. 결정적인 찰나를 판가름지어야 하는 만큼 고화질의 디지털 TV와 초고속 카메라 정도는 설치돼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다르다. 판독을 위해 제공되는 장비는 약 20인치 크기의 컴퓨터 모니터 한 대가 전부이다. 일반 시청자들이 보는 텔레비전 화질보다도 못한 컴퓨터 모니터 영상에 의지해 판독하고 있다는 것이 판독위원들이 전하는 고초다.
이규범 비디오 판독위원은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의 모니터인 데다 가로 길이가 텔레비전보다 짧다 보니 화면에 반영될 수 있는 폭이 한정돼 있다”고 지적한다.
경기장 내 판독용 카메라 역시 한 대뿐이다. 그마저도 위에서 아래쪽 시야를 잡는 각도로 고정되어 있어 캐치볼이나 네트터치 여부를 정확하게 잡아내기 어렵다. 오히려 곳곳에 위치한 보도용 중계카메라의 영상을 판독용 모니터에 띄워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판독위원들은 실질적으로 비디오 화면보다 눈과 경력이 주는 감각에 더 의존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황승원 경기판독위원장은 “경기 흐름을 오랜 시간 끊을 수 없다 보니 신속성을 위해 몇 장면만을 확인하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 공이 너무 빠르면 화면에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상황에선 경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심판의 첫 판정을 존중해 결과를 발표한다.
경기라는 것이 승패가 갈리는 싸움인 만큼 감독이나 팬들로부터 받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판독가의 숙명이다. 요 근래 가장 큰 주목을 끌었던 지난 1월 17일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의 경기. 당시 비디오 판독에 대한 최종결과를 발표했던 장윤창 경기운영위원은 “평생 욕먹을 거, 이번 시즌에 다 들은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양 팀의 공방이 절정을 이루며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경기가 진행되던 4세트, 가빈(24·삼성화재)의 마무리 공격으로 삼성의 승리가 결정되고, 환호가 터지려는 순간 ‘네트터치 범실’을 알리는 부심의 휘슬이 울리면서 경기장은 일순간 정적 상태가 됐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55)은 임시형(25·현대캐피탈)의 네트터치 범실이 먼저라 판단,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가빈의 네트 터치로 나왔고, 현대의 공격 승리로 인정됐다.
장 위원은 “네트가 흔들리는 것을 보긴 했지만 화면이 워낙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힘들었다”고 당시 비디오 판독 자체가 어려웠던 점을 설명했다.
관례대로 심판의 최초 판정을 존중해 현대 쪽에 1점을 내주자 삼성 팬들이 ‘현대캐피탈의 홈 경기장이라는 이유로 어드밴티지를 준 것이다’ ‘V리그 팬들의 재미를 위해 5세트를 유도하기 위한 판단이었다’는 등 편파판정을 주장하는 각종 비난 여론이 프로배구연맹 게시판을 물들이기도 했다.
설비 보완 이외에도 제도 자체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감도 판독위원들 내부에서 일고 있다. 실명을 밝히기를 꺼려한 한 관계자는 비디오 판독이라는 것 자체가 오히려 경기장의 심판 수만 늘렸다고 지적한다. 한 명의 심판에게 모든 것을 위임해 결정하면 될 일을 비디오 판독이라는 것을 도입해 여러 명에 의해 결정하게 하다 보니 의견일치를 보느라 경기흐름만 끊게 된다는 것.
판독위원들은 설비 보완 이외에도 감독들이 좀 더 성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주문한다. 상대팀으로 기우는 경기흐름을 끊을 목적으로 별 다른 확신 없이 비디오 판독을 신청하는 경우나, 경기 후 사적으로 전화를 걸어 다음 경기 때도 이렇게 나온다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판독보다 정확 '서열의 법칙'
'선배 추궁이 더 무서워'
선후배 간의 엄격한 서열이라면 스포츠계도 군대 못지않다. 각자 다른 팀에서 뛰고 있더라도 과거 선후배 관계에서 오는 서열관계는 동일하게 작용한다. 비디오 판독관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을 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규범 판독관은 비디오 판독에 걸리는 시간 동안 선수들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을 벌이던 중 동문 선배라는 점을 언급하며 “너 네트 쳤어 안 쳤어?”라고 추궁하면 후배가 “그렇다”고 수긍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때 판독 결과가 네트를 스치지 않은 것으로 나오면 추궁했던 선배와 해당 팀 감독이 “본인이 맞다고 하는데 왜 판독은 아니라고 하느냐”며 거세게 항의하기도 해 판독관을 당혹케 만들기도 한단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