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약 2주 동안 교토퍼플상가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돌아왔는데, 현지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한국과 훈련 스케줄이나 스타일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적응하는 데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말이 안 통하다보니 부분적인 어려움이 생기더라. 나이도 있고 고참 선수급 대접을 받아서 그런지 내가 신경 쓸 게 많지 않았다.
―한때 곽태휘의 몸은 ‘유리병’이란 얘기가 있을 정도로 부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더욱이 2008년 한 해에 수술을 두 번이나 받지 않았나.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다. 2008년 K리그 개막전에서 왼쪽 발목 인대 부상을 당해 독일에서 수술과 재활의 시간을 보낸 후 6개월 만에 복귀해서 한창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 다니다가 그해 11월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를 또 다친 것이다. 물론 독일의 같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처음 다쳤을 때는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수술 후 재활도 열심히 했고 유럽 경기들을 챙겨보면서 공부도 많이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상은 정말 힘들었다. 마치 나한테 저주가 내린 듯했다. 다친 순간, 느낌은 있었지만, 부디 십자인대만 아니길 바랄 정도였다. 첫 부상이 몸이 다친 부상이었다면, 두 번째 부상은 몸보다 마음이 더 다쳤고 회복 속도도 느렸다.
‘허정무호의 황태자’ 소리를 들으면서 대표팀에서 주가를 드높였던 곽태휘는 잇단 부상과 수술, 그리고 재활의 시간들을 거치며 자신의 축구 인생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듯했다고 한다. 더욱이 두 번째 수술 때에는 아내와 떨어져 독일에서 혼자 지내 마음고생이 더욱 심했다고. 임신 중이던 아내가 잠시 독일로 들어온 후에야 안정을 찾았다는 곽태휘는 아들 시훈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마음 잡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면서 가족이 주는 행복감을 에둘러 표현한다.
▲ 연합뉴스 | ||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조건 나가는 게 능사는 아니다. 얼마만큼 준비를 잘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국 선수들은 외국에서 통할 수 있는 좋은 실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적응 여부와 첫 인상을 어떻게 심어주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것 같다. (이)청용이가 지금처럼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볼튼에서의 첫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한 게 크다. 청용이의 모습을 보면 배울 점이 많다.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싶어하는 나한테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외국 진출하는 데 돈과 명예 중 어느 부분이 더 크게 작용하나.
▲내 경우에는 돈보다 명예다. 만약 프리미어리그에서 돈을 적게 줄 테니 올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무조건 간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고, 설령 그 기회를 선택해서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좋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고 본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고향인 경북 왜관의 구청 앞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길거리 응원을 하며 월드컵에 푹 빠져 지냈다고 들었다. 8년 후인 2010년에는 길거리 응원이 아니라 엄연히 대표팀 선수가 돼 남아공월드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감회가 남다르지 않나.
▲(웃으면서) 아마 그때가 대학생 신분으로 휴가를 맞아 고향을 방문했을 때였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에서 뛰는 것조차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아직 내가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정말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곽태휘는 축구를 하면서 월드컵 출전만을 목표로 하진 않았다고 한다. 물론 월드컵이 축구선수들한테 꿈의 무대이긴 하지만, 자신한테 월드컵은 그리 간절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단, 뛸 수 있게 된다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은 있다고 강조했다.
―허정무 대표팀 감독과의 인연도 참으로 묘하다. FC서울에서 전남드래곤즈로 이적했을 때 허 감독이 전남팀을 맡고 있었고, 6개월 후에 대표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았나. 만약 그때 전남으로 이적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다. FC서울에서 트레이드됐을 때는 정말 많이 힘들었다. 너무 억울했고 분했다. 자연히 독한 마음도 들었고 오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전남에서 완전히 다른 축구를 접했다. 이전에는 기계처럼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전남에선 내가 갖고 있던 잠재 능력이 발휘됐다. 허 감독님이 그걸 끄집어 내주셨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셨다. 만약 허 감독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지금도 평범한 선수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결정타는 감독님이 대표팀 감독이 되셨다는 부분이다(웃음). 감독님께서 날 직접 지켜보셨기 때문에 대표팀 승선의 기회도 빨리 주어졌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