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휩쓴 이승훈, 이상화, 모태범 선수(사진 왼쪽부터). 연합뉴스 | ||
‘이규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비싼 돈 들여가며 해외전지훈련을 가는지 말입니다. 곁눈질이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하고, 어떻게 경기를 뛰는지 배우기 위해서 아닙니까? 한국은 이미 이규혁, 이강석, 문준 등 1그룹 정상권의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365일 내내 함께 먹고 자고 훈련하는데 당연히 후배들의 기량이 쑥쑥 자라지 않겠습니까? 금메달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이들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손세원 성남시청 빙상단 감독이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밝힌 내용이다. 모든 일에 역사가 있듯 이번 한국빙상의 밴쿠버 쾌거에도 앞세대의 눈물겨운 세계 정상 도전사가 있다는 뜻이다. 손 감독뿐 아니라 많은 미디어가 이규혁(32)의 올림픽 불운과 도전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올림픽에서 이렇게 메달 하나 따지 못하고도 찬사를 받는 선수는 아마 없는 듯하다.
이규혁은 한국빙상에서 그 아우라가 특별한 선수다. 실력도 출중하지만 ‘뱃속부터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빙상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버지(이익환)는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이고 어머니(이인숙)는 한국 피겨계의 ‘대모’였다. 당연히 초등학교부터 ‘빙상신동’으로 불렸고, 13세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월드컵과 세계스프린트선수권 등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로 우뚝 섰지만 이번까지 5번의 올림픽에서는 메달 하나 건지지 못할 만큼 불운하기만 했다. 특히 이번 밴쿠버 직전에 열린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그 어느 때보다 큰 기대를 모았다.
올림픽 전만 해도 밴쿠버의 영웅인 모태범은 이규혁에 비해 실력이나 노련미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됐다. 이규혁이 지나친 긴장감 등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반면 모태범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이규혁의 자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성공신화를 쓴 것이다. 모태범 스스로 “이규혁 이강석 등 세계 최고의 선배들을 보면서 꿈과 자신을 키웠다. 내 스승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모태범은 물론이고, 남자선수들과 함께 훈련한 이상화까지 이들은 이규혁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상화의 금메달 질주. | ||
퓨전의 힘, 이종교배. 하이브리드…. 정말이지 많은 표현이 쏟아지고 있다. 수사(修辭)가 현란하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쇼트트랙 세계 최강인 한국인 쇼트트랙 기술을 바탕으로 빙속도 제패했다는 것이다.
이번 밴쿠버올림픽에서 어록이 나올 정도로 화제의 해설을 선보이고 있는 제갈성렬 SBS 해설위원은 “장비가 발달하면서 세계 스피드스케이팅의 흐름은 최근 파워보다는 기술로 바뀌고 있다. 당연히 주법, 그것도 코너링 기술이 아주 중요하다. 스피드 대표선수들이 코너링이 중요한 쇼트트랙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세계 최고의 주법을 완성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쇼트트랙 병행 훈련은 이미 2003년부터 시작됐지만 이번 밴쿠버올림픽을 앞두고 지난해 5월부터 집중적으로 실시됐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불리는 김관규 스피드 대표팀 감독(43)은 주 3회씩 한 바퀴가 111.12m인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훈련을 했다. 넘어지기 직전까지 최고의 속력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 최적의 균형점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훈련이었다. 지상에서도 쇼트트랙의 대표적인 훈련법인 탄력밴드훈련(밴드를 몸에 묶은 채 하는 코너링)도 실시됐다.
물론 이 같은 쇼트트랙 훈련은 ‘흑색 탄환’ 샤니 데이비스(28·미국) 등 외국선수들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쇼트트랙 최강국인 만큼 최고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또 이렇게 훈련만 쇼트트랙의 비법을 접목한 것이 아니다. 쇼트트랙 전향 10개월 만에 세계적인 선수로 거듭난 이승훈처럼 아예 종목을 바꾸는 선수까지 나왔다. 이승훈은 향후 쇼트트랙과 스피드를 병행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손세원 감독은 “모태범 이상화의 금메달도 소중하지만 기술적으로 이승훈의 장거리 은메달은 정말 의미가 대단한 것이다. 종목전환, 체격적인 열세 등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깬 것이다. 앞으로는 쇼트트랙과 스피드를 병행하는 선수가 많아질 것이다. 한국이 세계 스케이팅 역사에서 흐름을 바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독특한 기술훈련 외에 ‘불암산 크로스컨트리(전 종목 선수들이 태릉선수촌 뒷산을 오르며 기록을 재는 것)’에서 늘 상위권에 오르는 빙상의 살인적인 체력훈련, 그리고 체육과학연구원의 도움을 받은 과학적인 훈련도 밴쿠버 쾌거의 밑거름이라고 평가받는다.
▲ 지난 16일 모태범이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2차시기에서 역주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은 <일요신문>의 연재 글에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직후 김영삼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태릉선수촌에 배드민턴과 핸드볼전용경기장을 지었고, 내친김에 400m 실내빙상장(250억 원)을 건설했다’고 밝혔다. 김봉섭 전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은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는 종목은 시간이 가면 경기력이 향상되는 법이다. 태릉실내빙상장 건설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10년 만에 그 의의를 새롭게 평가받게 돼 기쁘다”라고 말했다.
2001년 1월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한국빙상의 인프라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태릉과 춘천에 빙상장이 있었지만 모두 야외로 겨울철 몇 달만 훈련할 수 있었다.
당연히 400m 국제 규격의 메인 링크, 2개의 보조 링크(30m)로 개장한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새 역사를 예고했다. 국제스프린트, 월드컵 등 A급 국제대회를 개최했고, 무엇보다 선수들은 1년 중 10개월을 마음껏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을 갖게 됐다. 태릉스케이트장의 임석천 과장은 “일본도 실내빙상장이 생긴 후 세계적인 선수가 배출됐다.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밴쿠버 쾌거에는 삼성의 힘도 크게 작용했다. 손세원 감독은 “간단하다. 빙상연맹은 20명의 선수를 50일간 해외전지훈련을 마음껏 보내줬다. 아무리 태릉시설이 좋아졌다고 해도 날씨, 그리고 외국선수들과의 경쟁 등을 고려하면 이런 지원이 큰 도움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지난 1997년부터 한국빙상연맹을 후원해왔다. 1996년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IOC 위원이 되자 동·하계의 대표 종목인 육상과 빙상을 책임진 것이다. 탁구선수 출신으로 삼성스포츠를 총지휘하던 박성인 삼성스포츠단장(현 고문, 밴쿠버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이 빙상연맹 회장을 맡아 올해까지 14년째 한국빙상을 이끌어왔다. 대한빙상연맹 측은 “1997년부터 매년 평균 8억 원 이상을 삼성화재가 지원했다. 8억 원에는 올림픽 특별지원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못해도 이제까지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대한체육회의 하드웨어 투자, 그리고 삼성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 빙상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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