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승자 콩지에 9단(왼쪽)과 이창호 9단. | ||
제1국은 흑을 들고 2집반, 2국은 백을 들고 1집반을 졌다. 스코어가 말해 주듯 두 판 모두 미세한 승부였다. 이 9단도 이번에는 작심하고 나선 모습이었다. 큰 실수도 없었고, 전체적으로 내용도 나쁘지 않았는데도 “흐름으로는 콩지에 9단의 ‘한판승’이라는 느낌이다. 이 9단도 잘 두었지만 콩지에 9단이 더 잘 두었다”는 것이 검토실의 중론이었다.
24일은 밴쿠버 겨울 올림픽에서 이승훈과 김연아가 우리를 열광케 했던 날이다. 그날 바둑팬들은 바둑TV와 인터넷 생중계에 눈을 맡긴 채 이 9단이 비록 어제 1국은 놓쳤지만, 오늘은 이겨 일 대 일을 만들고 내일 또 이겨 역전 우승, 준우승의 긴 터널에서 마침내 벗어날 것으로 기대했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상심이 작지 않았다.
콩지에의 기세가 놀랍다. 재작년 무렵까지만 해도 콩지에는 그렇게 무서운 상대는 아니었다. 세계대회와는 별로 인연이 없어 2004년 제2회 도요타-덴소배 4강이 최고 성적이었고 보통은 8~32강 정도였는데, 지난해부터 돌연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제13회 삼성화재배 준우승으로 국제무대에 결승에 얼굴을 내밀고 제21회 TV 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세계타이틀 홀더에 이름을 올리더니 곧장 제14회 삼성화재배를 차지했고, LG배 우승으로 세계대회 3관왕으로 치달았다. 중국 내에서도 현재 구리 9단을 제치고 랭킹 1위에 올라 있다.
콩지에의 상승세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콩지에는 이번에 이창호에게 이긴 것 말고도, 결승에 올라오는 과정에서 이세돌 9단, 강유택 3단, 최철한 9단, 박영훈 9단 등 한국 기사만, 대표급과 유망주를 섞어 4명을 연파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서봉수 9단이 중국 기사에게는 거의 전승을 기록, 중국 킬러로 불리면서 중국 기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던 것처럼, 이런 식이라면 콩지에는 가히 한국 기사 킬러인 것.
패자의 변명일 것도 같고, 시쳇말로 몽니일 것도 같아 좀 그렇기도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대국장소 문제다. 장소가 격에 맞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거기서 이틀, 그것도 반나절 정도 바둑 두고 2억 5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가져가게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스튜디오 대국은 재고할 사안이다. 스튜디오를 아무리 잘 꾸몄다 하더라도 문제는 조명이다. 너무 뜨겁다.
더구나 이창호 9단은 스튜디오 대국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뜨거운 조명 때문이다.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잖아도 종종 두통을 호소하는 이 9단이니 말이다. 스튜디오 안에서는 잠깐 인터뷰만 해도 땀이 나는데, 이건 인터뷰도 아니고, 움직이면서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반나절 이상을 머리를 쥐어짜며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 고충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관계자들이 그런 걸 모를까. 안다면 문제다. 이상하다. 아니, 남들은 홈그라운드 이점을 못 만들어서 고심하는데, 이건 이점은커녕 불리한 여건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이 9단을 위해 따로 대국실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은 좀 피해 주자는 얘기다. 스튜디오 조명이 이 9단에게만 고역인 것도 아닐 게다. 상대도 유쾌할 리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이 9단을 위해 특별대국실을 만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게 챔피언에 대한 예우 아닌가. 바둑 동네에서 바둑 챔피언을 예우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
1980년대 조치훈 9단이 일본 바둑을 평정하던 시절의 얘기다. 기성전인지 명인전인지 아무튼 빅3 가운데 하나였다. 도전기 한 판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는데, 행사 관계자들이 대국 전 날 대국장을 준비하고 점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7치나 두꺼운 비자 바둑판을 이리저리 놓아보고 높이도 조절하는 등 별 세세한 것까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바둑판 위에 혹시 그림자 같은 게 생기지 않나 해서 실내조명의 각도와 밝기를 점검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일본 얘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일본이 꼭 좋아서가 아니다. 적어도 챔피언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배려는 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좀 끓는다. 이창호를 이창호가 내켜하지 않는 뜨거운 조명 아래의 스튜디오에 ‘밀어넣고’ 세계대회 타이틀 매치를 하라는 하는 그 발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싸울 수 있는 마당은 만들어 주어야지. 특별히 ‘더’는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 정도는 해 주어야지. 준우승이니 우승이니, 중국이 우리를 앞섰느니 말았느니 그런 것만 따지지 말고. 이창호는 국보급 기사니 어쩌니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경비가 문제라면 차라리 LG 사옥 같은 곳도 있지 않은가. 아니 사옥이 아니더라도 LG배 결승 정도면 대국장을 제공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많지 않을까. 이창호 같은 세계적 대스타를 직접 볼 수 있는 데다가 공짜로 홍보가 될 텐데 말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