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돌 9단 | ||
17연승의 출발은 위태위태했다. 연구생 소년에게 필패지경까지 몰렸다가 회생했으니까. 이후에도 흐름은 비슷했다. 초반부터 시원하게 리드하면서 이긴 바둑은 별로 없었다. 초반 불리 → 중반 난전 유도 → 괴력 발휘 → 펀치 작렬, 역전의 패턴이었다. 그래서 구경하기는 더 재미가 있었다.
관전객들은 “더구나 판을 흔들어 지진을 일으키는 솜씨나 피아가 불분명한 공방의 혼돈 속에서 상대를 몰아가는 현란한 행마, 사정권에 들어온 대마는 놓치지 않는 타격의 정확성과 파괴력은 전성기의 조훈현 9단을 능가하는 모습이다. 6개월의 휴직은 승부호흡으로는 공백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전열을 정비하는 데에는 앞으로 시간이 좀 더 필요할지 모르지만, 반면에 에너지의 재충전 기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BC카드배와 춘란배, 세계대회에서 중국 기사들을 격침시킨 것이 갈채를 받았다. BC카드배 16강전에선 중국 콩지에 9단을 격파했다. 콩지에는 최근 한·중의 정상급을 연파하며 은연중 세계일인자 자리를 굳히려는 눈치였는데, 이세돌에게 걸린 것. 그것도 초반에 80집이 넘는 이세돌의 대마를 잡아 놓고도 그것보다 더 큰 대마가 몰살당해 184수 만에 항서를 쓴 것이니, 그것 참. 기량이 경지에 들어섰고, 승부에도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다는 평을 받던 콩지에였지만, 이세돌의 회오리 검법을 막아내지 못했던 것. 아무리 승패병가지상사라지만 적잖이 당황스럽고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다.
춘란배에선 대만의 일인자 저우쥔쉰 9단(30)과 중국의 촉망받는 신진강호 쑨텅위 7단(18)을 제압했다. 콩지에, 저위쥔쉰, 쑨텅위와의 세 판 모두 이세돌의 대마사냥으로 끝난 단명국이었다. 저우쥔쉰은 157수, 쑨텅위는 불과 112수만에 돌을 거두었다.
예전에 사람들이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을 비교하면서 조 9단은 백도(白道), 이 9단은 흑도(黑道)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봐도 밝고 빠른 조 9단이고, 그에 비해 대체로 느리고 어딘지 좀 어두워 보이는 이 9단이었으니까, 그런 비유는 일리가 있었다. 조 9단은 화사한 속력행마로 적을 섬멸했으며 이 9단은 여간해서는 가슴에 품은 무기를 꺼내는 법이 없이 느릿느릿, 끈끈한 기다림과 계산으로 상대를 제풀에 지치게 했다.
그런데 최근 이세돌의 바둑을 보면 이세돌의 바둑은 백도일까, 흑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상천외한 발상과 전광석화 같은 속력, 흔들기, 그런 걸로 보면 조훈현 계보 같고, 그렇다면 백도일 텐데, 한편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다, 조훈현류라고 하기에는, 조훈현류와는 좀 다른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앞서 말했듯 조훈현은 외모도 그렇지만, 산뜻하고 화사하다. 음악으로 치면 모차르트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이세돌은 착상이 기상천외하면서 기괴하다. 외모도 대국 중의 그 눈빛을 보면, 조훈현은 날카롭지만 이세돌은 무섭다. 조훈현이 한낮의 미사일이라면 이세돌은 혼자 임파서블 미션을 수행하는 저격수 혹은 자객과 같다. 왕년에 일본에는 대마 킬러가 있었다. 가토 마사오 9단이다. 이세돌도 대마 킬러지만, 킬러 가토와 킬러 이세돌은 거기서도 느낌은 다르다. 가토는 백도의 킬러였다.
그렇다면 이세돌은 백도인가, 흑도인가. 아니, 이세돌의 바둑에 대해서는 기풍을 백도, 흑도로 구별하는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을 것도 같다. 다른 제3의 무엇이, 또 다른 개념의 유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런데, 사람들은 이세돌이 요즘 많이 변하고, 겸손해졌다고 한다. 요즘 이세돌은 바둑을 이기고 나서 인터뷰할 때 열에 아홉은 “내가 나쁜 바둑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하고 “더 좋은 바둑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한다. 상투적이고 의전적인 말들이다. 예전에도 인터뷰할 때는 그랬다. 그렇다면 뭐가 변하고 겸손해졌다는 것인지. 표정과 어투가 바뀌었다는 것. 진정이 묻어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겸손한 킬러, 겸손한 자객이라는 것인데, 그건 좀 어색한 것도 같다. 누리꾼의 댓글에는 “예전처럼, 한국기원과 옥신각신할 때처럼 자신감 넘치는 말을 해라. 그게 어울리고 멋있다”는 거다. 그렇지. 킬러는 도도하고 오만한 것이, 영화나 소설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어쩌면 그 나름대로 잠시 자숙의 시간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숙하고 있다는 걸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세돌은 4월 8일, 제23회 후지쓰배 바둑을 두러 도쿄로 날아갔다. BC카드배와 춘란배, 후지쓰배, 겸손해진 자객이 세계대회를 어떻게 요리할지 궁금하다. 지금의 기세라면 셋을 다 접수할 가능성도 있다. 자신의 의지로 다진, 겸손이라는 무기를 가슴에 품은 카운터 테너 목소리의 킬러, 새로운 유형의 킬러다.
휴식은 정체가 아니다. 후퇴는 더욱 아니다. 적절한 때의 적당한 휴식은 폭발을 위한 비축이다. 이창호도 한 6개월쯤 쉬는 것은 어떨까. 여행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말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