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직전 검찰 수사에 연루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 ||
한나라당이 이명박 전 서울 시장 관련 고소고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착수에 당황하며 서둘러 고소 취하를 권유한 것은 2002년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당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던 이회창 후보가 ‘3대 의혹 사건’인 병풍, 기양건설 10억 원 수수 의혹, 20만 달러 수수 의혹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선거 막판에 발목을 잡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는 무혐의 등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그 결론이 나기까지는 의혹이 사실인 양 과장되기도 하고 또 상대편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2002년 대선은 사실상 검찰의 수사가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한나라당 시각에서 ‘검풍’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른바 ‘병풍’ 의혹이 그 대표적인 사례. 의무하사관 출신인 김대업 씨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시작된 병풍 의혹은 당시로서는 선거전의 최고 이슈였다. 이회창 후보 측이 장남 정연 씨의 불법 병역면제를 은폐하기 위해 병무청 수뇌부와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해 6월 민주당 천용택 의원이 의혹을 제기하고 7월 3일 김대업 씨의 기자회견으로 의혹은 증폭됐다. 한나라당은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병역비리 은폐의혹의 확산을 조기 차단한다는 목표 아래 의혹을 폭로한 김대업 씨를 형사고발하고 김 씨와 민주당 간의 공모 의혹을 제기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다. 반면 민주당은 병역비리은폐 의혹을 이 후보의 ‘아킬레스건’으로 판단, 국면 반전을 노린 총공세에 나서 ‘병풍’ 의혹은 양측의 사생결단식 싸움으로 확전됐다.
김대업 씨는 이 후보 부인인 한인옥 씨가 장남 정연 씨의 병역면제를 위해 2000여만 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 녹음테이프를 검찰에 제출했다. 한나라당 측은 김 씨의 병역비리 폭로가 조작이라고 주장했고 민주당은 이 후보 측이 병역면제를 위해 무엇인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핵심은 녹음테이프의 진위였다. 검찰은 그해 8월 조사를 통해 ‘테이프 판독 불가’라는 감정결과를 발표했으며 <일요신문>은 9월 녹음테이프 ‘조작 가능성’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 결국 수사는 선거를 2개월도 채 남기지 않은 10월 말 의혹 전반에 대해 ‘근거 없다’는 결과를 발표하고 끝이 났다. 그리고 대선이 끝난 뒤인 2003년 2월 김 씨가 무고혐의로 구속기소 되어 2004년 징역 1년 10월을 선고받으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끝난 것은 김대업 씨의 폭로뿐이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오히려 이회창 후보 자녀들의 병역 비리 의혹 자체는 그대로 유권자들의 뇌리에 각인됐다고 한나라당은 보고 있다.
한편 2002년 대선을 불과 1개월 앞두고 나온 기양건설 사건은 이 후보의 부인 한인옥 씨가 기양건설로부터 비자금 10억 원을 받았다는 의혹이었다. 11월 기양건설 비자금 장부가 언론에 보도되고 민주당이 한 씨를 고발하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선거 막판의 분위기를 달구었다. 민주당은 “한 씨가 1997년 기양건설로부터 10억 원을 불법 수수하고 그 일부가 이 후보 일가가 살았던 호화빌라의 전세 보증금으로 사용됐다는 의혹이 있다”며 한 씨의 출국금지 및 소환조사, 기양건설 비자금 장부에 대한 압수수색과 계좌추적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는 이회창 후보의 패배로 끝난 뒤인 2003년 4월에야 나왔다. 기양건설의 비자금 장부는 조작된 자료로 밝혀졌고 가짜 비자금 장부를 만든 기양건설 전 간부 2명이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기소 되어 1년 6월의 실형선고를 받았다.
20만 달러 수수설은 2002년 4월 당시 민주당 설훈 의원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근인 윤여준 전 의원이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에게서 20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하며 시작됐다. 수사 결과 20만 달러 수수설은 허위였음이 밝혀지고 2003년 2월 설 전 의원은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리고 그해 3월 27일 서울지법의 첫 공판에서 설 전 의원이 ‘청와대 개입’ 사실을 실토함에 따라 새로운 차원에서 파문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가 경선에 불복, 신한국당을 탈당해 국민신당 후보로 나서기는 했지만 선거 판도는 김대중 이회창 후보가 백중세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김대중 후보(DJ)의 비자금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선거를 두 달여 앞둔 10월 7일이었다. 강 총장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365개의 가차명·도명계좌를 통해 동화은행 등에 입금액 기준으로 67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 관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검찰수사를 촉구했다. 하지만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형평성과 대선 전 수사 종결 불가능 등의 이유를 들어 이 문제에 대해 수사유보를 결정했다.
당시 김 검찰총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현 시점에서 수사에 착수할 경우 극심한 국론 분열과 경제회생의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국가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게 되는데다 수사기술상 대선전에 수사를 완결하기도 불가능해 대선 이후로 수사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만약 검찰이 수사 유보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가 단순히 정치권의 이슈로 머물면서 대선에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한국당은 DJ 비자금 문제를 거론하며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 반등을 도모하려던 대선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된 반면 국민회의는 검찰 발표 일주일 후 자민련과 ‘DJP단일화’ 협상을 이뤄내면서 DJ 대세론 형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DJ 비자금 문제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검찰수사가 재개돼 무혐의로 결론이 난다. 98년 2월에 발표된 검찰 수사결과 발표 내용을 보면 DJ의 비자금과 관련한 한나라당의 고발 내용이 대부분 허위거나 과장됐고 비자금 자료 작성을 청와대가 주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97년 대선 당시 수사유보를 결정한 김태정 검찰총장은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