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닥터 김사부>는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을 무대로 사명감으로 뭉친 의사들과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환자들이 뒤엉켜 겪는 이야기다. 의사 대 환자라는 의학드라마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드라마는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1월 7일 방송을 시작하고 불과 8회 만에 시청률 20%를 돌파하면서 이 드라마만의 ‘강점’이 시선을 끌고 있다. 그 핵심은 드라마를 지배하는 진한 인간애, 즉 휴머니즘에서 나온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는 현란한 의학 기술이나 의사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의사와 환자라는 각자의 처지를 떠나,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애틋한 감정이 주를 이룬다. 한 번 채널을 고정하면 관심을 거두기 어려운 휴머니즘의 힘이 시청률 상승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휴머니즘을 바탕에 둔 이 같은 의학드라마의 성공은 앞서 <종합병원>으로 시작해 <하얀거탑>, <굿닥터> 등으로 이어진 바 있다.
# ‘휴머니즘’…의학드라마의 인기 키워드
<낭만닥터 김사부>는 지방의 초라한 병원을 배경으로 ‘괴짜 천재’로 불리는 의사 김사부(한석규 분)와 열정이 넘치는 젊은 남녀 의사 강동주(유연석 분), 윤서정(서현진 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관록 있고 신념도 강한 김사부는 자신을 위협하는 권력이나 돈에 굴하지 않고 오직 의술을 펼친다. 젊은 의사들도 이에 공감하고 뜻을 모은다. 그 과정이 매회 뭉클하게 그려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의학드라마가 최첨단 의학 기기를 내세운 최신 의술로 시청자의 시선을 빼앗거나 마치 실제상황처럼 현실감을 높인 수술 장면으로 시청률을 공략했다면 <낭만닥터 김사부>는 여러 인물들이 집중한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감성이다. 어떠한 외부 개입 없이 의사의 판단과 실력으로 생명을 구하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그렇게 이 드라마의 지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야기를 지탱하는 힘은 주인공 김사부를 연기하는 배우 한석규다. 의학드라마 출연은 처음인 그는 마치 ‘현대판 허준’에 비견될 법한 확실한 개성을 보이며 의술을 펼치는 과정을 연기한다. 거대 자본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의사의 모습이 한석규를 통해 시청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연출을 맡은 유인식 PD는 “드라마의 배경인 돌담병원에는 온갖 사람들이 응급실에 실려 온다. 사연이 많은 택시 기사부터 경운기에 깔려 다리가 으스러진 환자, 인근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가 과로로 실려 온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여러 인간 군상 속에 그들을 치료하는 드라마의 이야기는 결국 휴머니즘을 다루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주인공 한석규 역시 “기본에 충실하자”는 제작진의 뜻에 동의해 출연을 결정했다. TV 드라마 출연에 인색한 그가 사극이 아닌 현대극에 출연하기는 1995년 참여한 <호텔> 이후 무려 21년만이다.
# <블러드>는 실패, <하얀거탑> 성공…왜?
<낭만닥터 김사부>의 시청률 20% 돌파는 최근 몇 년 간 방송된 의학드라마들의 성적과 비교하면 더욱 의미를 더한다. 의학드라마가 다른 장르와 비교해 대부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해도,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사례도 많다.
올해 6~8월에 방송한 장혁 주연의 KBS 2TV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는 평균 시청률이 3%에 그쳤다. 소위 ‘애국가 시청률’에 해당하는 굴욕을 당했고, 조기 종영하는 수모도 겪었다. 지난해 방송한 구혜선 주연의 KBS 2TV 드라마 <블러드> 역시 비슷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시청률 4%에 머물면서 ‘최악의 의학드라마’로도 꼽히고 있다.
이들 의학드라마는 저마다 스타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와 연출자 등 제작진이 참여한 작품들이지만 원하는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키워드는 ‘휴머니즘’이다.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장혁은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지만 인간과의 감정 교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물.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할 수 없는 주인공에게 시청자도 동의하지 않았다. <블러드>에는 판타지의 개성이 가미됐다. 리얼리티보다 가상의 설정을 통해 새로운 의학드라마를 추구하려 했지만 제작진이 미처 시청자의 마음을 읽지 못한 엉뚱한 시도로 기록되고 있다.
1994년 방영된 MBC 드라마 ‘종합병원’ 스틸컷.
의학드라마의 성공을 결정짓는 핵심 키워드가 휴머니즘이라는 사실은 역대 가장 높은 인기를 얻은 작품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국내 안방극장에 병원과 의사를 내세운 본격 의학드라마의 시작은 1994년 MBC가 방송한 <종합병원>이다. 당시 드라마는 의사의 삶을 그리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가진 갈등과 성장을 함께 다루면서 ‘의학드라마의 시작’을 알렸다. 방송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대중의 기억에 뚜렷하게 각인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종합병원>은 혹독한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되는 인턴, 레지던트의 치열한 삶을 비추는 데도 공을 들였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과정을 매회 다른 에피소드로 그려냈고, 주인공 이재룡과 신은경, 김지수, 구본승 등 숱한 스타를 배출했다.
휴머니즘의 계보를 잇는 또 다른 의학드라마는 2007년 방송한 김명민 주연의 MBC <하얀거탑>을 꼽을 만하다. 의학계 관료주의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권력을 탐하는 암투극으로 주목받은 드라마이지만 그보다 성공을 원하는 의사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시청자로부터 인정받았다. 주인공 김명민을 중심으로 동료 의사들이 나누는 교감도 <하얀거탑>의 인기를 견인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